쌀개방, 그것이 문제다!

지난 주의 칼럼에서 이미 <쌀개방,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해 보았지만,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국내외의 정세가 매우 첨예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급기야 12월9일, 김영삼 대통령이 이 나라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정말 최초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없었지만,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쌀개방 저지를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걸었었는데, 정치가들의 선거공약을 순진하게 믿는 유권자들이 우리나라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 공약(公約)이 그야말로 거짓 공약(空約)이 되어 버렸다. 이번 일에 대해 현정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와 여권의 관계자들 사이에 말이 어긋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위 <문민정부>라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그리고 지금 까지 그런대로 잘 나가던 김영삼 대통령 정부의 명예에 적지 않은 상처를 주게 되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스위스의 제네바가 일약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우르과이 라운드의 최종 타결 시한이 다가오므로 각국 이해당사자들이 호반의 도시 제네바를 찾아들어 부산하게 정치행위를 펼쳤다. 우리나라에서도 허신행 농림수산부 장관을 비롯한 공식 대표단이 미키 캔터 미국 대표와 담판을 위한 회의를 가졌고, 야당 구회의원 두 분이 피터 서덜랜드 GATT 사무총장을 면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순박한 우리 농민 대표들이 그곳에 까지 날아가 쌀개방 반대시위를 벌였다. 보도에 의하면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벌써 일본이나 프랑스 농민들도 대대적이고 과격한 시위를 했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도 늦은 시간에,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파장 마당에 법석을 치는 것 같아서 웬지 마음이 찜찜하다.

쌀개방 문제는 그것 자체만이 아니라 다른 농산물, 그리고 수많은 공산품과 연관된, 그래서 너무도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어쨋거나 우리에게는 그 무엇 보다도 쌀개방 문제가 정서적으로, 또한 현실적으로 가장 예민한 사안인데, 이 현안에 대한 시각이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누인다. 한 쪽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불가 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단체와 범야권 세력이 포함된다. 이들도 내심으로는 이미 개방수용을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쪽은 현실주의자들로서 국제사회로 부터의 고립을 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실제적으로 결제적인 플러스 효과라는 논리로 쌀개방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어느 입장이 과연 한국의 이익을 위해서 좋은지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현재로서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 미래의 사회와 국제질서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정책이 얼마나 공의에 입각했으며, 얼마나 장기적인 안목에 의한 것이었는지에 따라 평가될 수 있을 뿐이다.

이번 사태로 현 정부는 농민과 야당으로 부터, 그리고 지식인들과 메스컴으로 부터 실컷 몰매를 맞고 있는 인상이다. 이미 무역 자유화 논의가 6,7년 전 부터 계속 쟁점화 되었고, 이로 인해 쌀개방이 현실로 다가오리라는 예상을 정부가 했었을텐데도 불구하고 <절대불가>만을 염불 처럼 외쳤지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지 못했기 때문에 협상의 유리한 시기를 놓쳤다는 질책이 있다. 정치가들이 당장 눈앞에 놓여 있는 총선이나 대선에만 마음을 썼지 정작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 없으며, 이는 바로 국민을 우롱한 처사라고 질타하는 소리도 들린다. 행정관료들도 역시 정권만을 의식하고 있었지 무역자유화라는 세계적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에 너무도 소홀했다.

정부가 게을렀다는 것, 책임감이 없다는 것, 그리고 부정직 하다는 비판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아직도 무조건 불가만을 외쳐대고 있는 야권도 거의 같은 수준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들만 의인인 것 처럼 행세하고 있는 매스콤, 특히 신문의 자세다. 모든 신문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접한 신문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지난 역사를 보아도 그런 기대를 할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오늘의 신문이란 이미 발생한 사건만 수집하여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여론을 건강하게 견인하고, 비판적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진단해야할 사명도 갖고 있다. 쌀개방을 정부가 정직하게, 혹은 지혜롭게 처리해 나가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신문도 역시 정부보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제퍼슨이 말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신문 없는 정부 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는 말은 신문의 사회적 책임감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뜻한다. 말이 약간 옆으로 흘렀지만, 이러한 책임감으로 부터 오늘 한국의 신문이라고 해서 자유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쌀개방, 무엇이 문제인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고 서로 소란을 피우는 쥐들 처럼 모두가 책임 공방에 급급하거나 비정한 국제질서 앞에서 자조적인 푸념을 늘어놓기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쌀문제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 전체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생명에 대해, 존재에 대해, 미래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부터 쌀개방의 본질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쌀개방의 문제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뒤꼬이게 된 이유는 우리의 삶이 갖고 있는 바탕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노력을 태만히 하자는 말은 아니다. 끝까지 쌀개방 불가로 버텨야 한다고,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유리한 쌍무협정에 임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농민의 절대 숫자가 매우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현실, 설령 쌀개방이 아니라 하더라도 농사꾼의 숫자가 감소하리라는 예상은 불문가지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농사정책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매우 전문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할 것이다. 다만 쌀개방의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두 가지 관점에서 풀어가야 한다는 점인데, 하나는 인간 생명에 대한 바른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대안의 모색이다. <9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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