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개방, 이제 부터 시작이다!

서울의 창경원은 혜화동에 있고, 거기서 좀더 미아리 쪽으로 가다 보면 삼선동이 나온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혜화동에 헤화국민학교가, 삼선동에 삼선국민학교가 있었는데, 나는 삼선국민학교를 60년대에 다녔다. 혜화동의 혜화국민학교에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다녔고, 삼선국민학교에는 서민 가정의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라고 기억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혜화국민학교는 사립이었던 것 같다. 삼선국민학교는 약간 후진 곳에 있었고, 혜화국민학교는 큰 길 쪽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삼선국민학교 아이들은 혜화국민학교 아이들에게 일종의 컴플렉스를 가졌다.

그 삼선 국민학교에 다닐 때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완전히 아믈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는 너두 나두 생존이 중요하던 시기였다. 겨울철이 되면 난로 곁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꽁꽁 언 상태에서 수업을 받았다. 주번은 아침 일찍 와서 난로 불을 피워야 했다. 유연탄 가루를 반죽으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한편으로 재미도 있긴 했지만 불 지피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그때 일 주일에 몇번 씩 미군으로 부터 원조 받은 강냉이 죽을 점심으로 먹었다. 큰 가마솥에 끊인 강냉이죽을 우리는 차례로 줄을 서서 도시락 통에 받아 먹곤 했다. 간혹 딱딱하게 굳어버린 분유를 배급받기도 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요새 아이들은 아예 분유를 먹지도 않을 터이지만, 그 맛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우리 꼬마들은 먹기를 탐했다.

우리 집의 생활은 국민학교 저학년 때 까지는 그런대로 지낼만 했는데 상급학년이 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때에 따라 봉지쌀 심부름을 했다. 두되나 세되, 혹은 다섯되 씩 누런 봉지에 담아서 가슴에 안고 다녔다. 점심 때는 식은 밥에 물을 많이 넣어 죽을 끓여 먹기도 하였다. 쌀밥만 먹는 경우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 뿐이었고, 지금은 건강식이라 해서 사람들이 찾는 보리밥을 많이 먹었다.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을 수 있었으면 다행이고, 사실 그것도 없어서 국수나 수제비로 점심과 저녁을 때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때는 우리나라의 쌀생산이 턱없이 부족해서 동남 아시아로 부터 수입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일년에 3모작 씩 하는 월남이나 태국 같은 나라에서 쌀을 들여온 것 같다. 알랑미라고 불렀던가? 우리나라의 아끼바리 쌀에 비하면 흡사 모래를 씹는 것 같지만 그 수입쌀도 항상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쌀은 정미소에서 매우 거칠게 정미된 것이기 때문에 쌀 색갈이 누렇다 못해 시커멓게 보였다.

쓸데 없는 사설이 길었는데, 이제 쌀개방의 결정으로 앞으로 언젠가는 미국 캘리포니아 쌀로 지은 밥을 먹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그렇게 가까운 날은 아니겠지만, 앞선 기술로 값싸고 맛있게 생산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쌀을 먹게 될 것이다. 우리의 쌀생산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수입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우리의 쌀생산도 자급자족의 단계를 넘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질서 속에서 강요당하는 것이기에 마음이 개운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현재 우리 모든 국민이 농민들을 위해서 마음을 쓰고 있다. 국회에서도 여야 구별 없이, 정부에서도 이구동성으로 농민을 위한 획기적인 정책을 제정, 발표하고 있다. 농민연금제 실시니, 농지보유상한선철폐니 하며 우르과이 라운드 협상타결로 입게될 농민들의 불이익을 보충키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는 우리 농산물 먹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칠 모양이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정책과 국민들의 호의적인 여론이 얼마나 지속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현대사에 있어서 너무도 오랜 세월 공산품 수출만이 살길인 것 처럼 국가의 모든 역량을 그곳에 쏟아부었고, 사실 지금도 그런 상태에서, 농정의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하다는게 솔직한 고백이다. 농민의 절대숫자가 감소하는 문제야 현대세계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하지만, 당장 돈이 되는 공산품만을 중심으로 한 삶의 질서와 사회구조를 개혁하지 않는한 정부와 시민단체의 농사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농민을 위한 정책은 근본적인 것에서 부터 찾아야 한다. 추곡가 이중구조나 몇 몇 지원정책으로 농촌을 살릴 수 없다. 역대정권이 그랬던 것 처럼 새마을 운동으로 시골길을 고치거나 지붕을 개량하는 것으로 농촌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가는 점점 더 어려운 길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시골에서의 삶이 도시에서의 삶보다 훨씬 떨어지게 만드는 현재의 사회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현풍만 하더라도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거의 대구에서 출퇴근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다. 첫째는 자녀 교육문제고, 둘째는 문화생활의 취약성 문제다. 오늘 한국인들, 더구나 농촌에 삶의 근거를 두고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그 땅을 떠나버렸다. 오늘과 같은 구조 속에서는 이농현상이 더욱 확대될 것이다. 덩달아서 농촌교회도 피폐해져 가고 있다. 논과 밭, 소, 돼지 다 팔아 아들, 딸 대학공부를 시켜놓으면, 그 자녀들은 도시에서 머물게 되고, 늙은 부모들은 계속 땅만 파먹고 살아간다. 죽을 때 까지. 이런 상태에서 농촌을 살리기 위한 몇 가지 대책을 실시한다고 해결될 것인가?

미래의 사회는 농촌과 도시의 구별을 허용하지 않을른지 모른다. 낙관적으로 보아 농촌의 전원적 분위기와 도시의 편리성이 복합된 그런 삶의 공간이 도래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한 사회가 빨리 정착하기 위해서라도 현재와 같은, 지나친 도시중심의 국가경영이 시정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시골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말 시골을 사람이 살만한 그런 곳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철학과 구체적인 노력이 있을 때, 그때 부터 쌀개방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할 것이다. <9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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