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각유감

이번에 단행된 김영삼 정부의 개각을 보고, 비록 비전문가의 돼먹지 않은 소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긴 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정치를 떠나서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과 이번 개각을 보고 왠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것 같아서 비록 목사의 감상적 직관에 불과하겠지만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해 보고자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감사원장이었던 이회창 씨를 임명했다. 한국기자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서 그는 성철 승려에 이어 두 번째의 인기를 모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를 국무총리로 기용한 것은 그의 선명성을 정치적으로 잠시 이용해 보려는 술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일단은 김영삼 정부의 개혁의지가 앞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신호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된다. 정부가 하는 일을 있는 그대로 판단해야지 무조건 삐딱하게 보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이회창 국무총리는 개혁의 상징성을 제고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기대해 봄직한 국무총리를 우리가 갖게 된 것만도 우리 시대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경제 각료가 소폭 교체된 것은 신경제계획의 일관된 추진을 위한 것이며, 경제기획원 장관과 농수산부 장관의 퇴진은 쌀 개방의 대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일반적 시각이 있다. 누가 경제 각료를 하던 그들이 취할 정치적 대책의 폭은 그다지 크지 않다. 경제는 그것 자체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는 국가경제가 일종의 글로벌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 두 경제 각료의 능력에 따라 국가 전체의 경제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민과 정부, 경제인과 정부 사이에 참된 신뢰관계를 주조(鑄造)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인 경제정책은 오히려 그 다음의 문제일 것이다.

황산성 환경처 장관이 결국 물러났다. 새문안 교회 김동익 목사의 부인이며, 한국 여성계에서 톡톡 튀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 할, 그 이름도 쨍쨍한 황변호사였다. 정말 그가 장관으로서의 자질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잘 나가는 여자에 대한 남성위주의 사회구조가 빚어낸 희생양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신문기자들이 황 장관의 아주 사소한 버릇이나 습관과 태도를 문제로 트집을 잡긴 했는데, 매스컴으로부터 정말 많이 얻어맞더니 김영삼 대통령의 돈독한 신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도중하차 하고 말았다.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아예 입각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최형우 내무장관의 기용은 이회창 국무총리와 더불어 개혁정부의 이미지를 최고조로 높이려는 대통령의 의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멋드러지게 민자당 사무총장으로서 삼국지의 장비처럼 무거운 칼을 휘두르다가 아들의 불법입학 사건에 의해 날지도 못하고 추락하고 만 그였다. 그 사건이 터진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도 대입을 인생의 모든 것인 양 생각하는 소박한 국민들이 많은데 최형우씨를 국민생활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는 내무장관에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 쓸 만한 인물이 태부족임을 시사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그에게 개혁 이미지가 남아있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자기 사람만 믿고 쓰려는 속 좁은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두 각료의 퇴임이 눈에 띈다. 한완상 통일원 장관과 이인제 노동부 장관이 그들이다. 한완상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곧 이인모 미전향수를 오직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으로 보냈다. 이를 놓고 많은 이들이 한 장관을 향해 통일지상주의자라느니, 낭만적 통일론자라느니 하고 비판했다. 그는 꽤나 운이 따르지 않은 장관이었던 것 같다. 그가 입각하기 전에 잘 진행되던 남북접촉이 국제질서의 긴장과 북한의 핵문제로 인해 경직되기 시작하여 별로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인제 노동부 장관은 취임 초 <무노동 무임금> 소용돌이에 휘말려 온 힘을 소진했다. 지난 봄 울산 등지에서 벌어진 파업 때 노동계에서 이 장관을 좀더 확실하게 밀어주었다면 그의 입지가 훨씬 강화되었을 것이며, 이것은 결국 노동계의 이익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노동계를 전향적으로, 그리고 애정을 갖고 해결해 보려던 이 장관도 한완상 장관과 같은 맥락 속에서 물러났다고 보아야 한다.

이번에 입각한 이회창씨와 최형우씨, 그리고 물러난 한완상씨와 이인제씨는 김영삼 대통령의 신망을 받았던, 그리고 계속 받고 있는 인물로서 나름대로 자기 소리를 갖고 있는 각료로서 개혁정부에 부응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입각한 두 사람과 물러난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속이야 들어가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 것으로 판단해 볼 때, 이회창씨와 최형우씨는 개혁적인 반면에, 한완상씨와 이인제씨는 진보적이다. 개혁적인 사람은 평화를 위해 일하지만, 진보적인 사람은 정의를 위해 일한다. 여기에 바로 이번 개각의 기본 틀이 있다. 김영삼 정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개혁인 인물이지 진보적인 인물이 아니다. 이것이 김영삼 정부의 한계이자 특징이다. 아마 진보적인 인물은 다음 정부에서나 자기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개각 때 마다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자주 바뀐다는 점이다. 특별히 업무상 실수나 인격적 하자가 없는 장관을 1년도 안되어 갈아치울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된 그 사람은 교통부 장관이 된지 2개월 만에 경제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장관이 아무리 자주 바뀌어도 상관없을 만큼 우리나라 관료사회가 탄탄하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만은 그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바뀐 각료들이나 유임된 이들이나 정말 국민들을 위해 정직하게 일을 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9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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