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만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탈레스는 만물이 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하였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종합하여 우주는 네 가지 원소, 즉 흙, 공기, 물, 불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엠페도클레스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사상적 궤적을 모두 검토할 필요는 없지만, 우주의 본질을 흙으로 본 그의 직관과 통찰을 통해 우리는 세계와 직면해 있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히브리인들은 다음과 같은 신앙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네가 얼굴과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흙으로부터 온 존재다. 생기와 흙이 바로 인간의 가장 확실한 근거다. 인간에게 영만 중요한게 아니라 육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의 이러한 신앙도 역시 인간의 원래성이 흘깅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은 흙이다.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다가, 다시 흘그올 돌아간다.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흙에서 나온다. 쌀이 그렇고, 배추가 그렇고 ,콩이 그렇다. 물도 본질적으로는 역시 이 땅의 산물이다. 밤나무, 감나무, 상수리나무, 해바라기, 채송화가 한결같이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금 필자가 이 글을 입력하고 있는 컴퓨터의 하드웨어도 엄밀하게 보면 역시 흙에서 나왔다. 책장이나 그 위에 진열된 책도 역시 그렇다. 인간 주변의 모든 것은 약간씩 형태를 달리할 뿐 한결같이 흙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흙이며, 그 주변이 흙이라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은 흙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닐까? 흙이면서도 흙이 아닌 것처럼 자기를 흙으로부터 분리시킨다면, 그건 흙으로부터 고상한 존재로 승화되는 게 아니라 본질을 상실하므로써 왜곡의 길을 가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되도록이면 흙과 멀리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게 문명인으로서의 당연한 삶인 것처럼 말이다. 어린아이들도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 그렇게 즐겼던 흙장난으로부터(그 당시 흙장난은 아이들의 최고의 꿈이며 현실이였다.) 추방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과 자기 공부방만 맴돌다가 흙이 무언지도 모르며 자라난다. 그게 과연 바람직한 길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두 발로 걷지 않고 자동차에 의지해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상 흙 위를 걷고 싶어도 도시란 도시는 온통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으로 떡칠을 해놓아씩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게 오늘 도시인의 운명이다.
거주 공간도 역시 그렇다. 옛날에는 대게 토담집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방음과 냉난방이 환벽하게 설치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에서 쾌적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당장 이런 편리한 삶을 포기하고 다시 옛날의 원시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지나치게 흙으로부터 단절되어 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됨의 본질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땅과 흙의 대상화다. 산업화니 개발이니 세계화니해서 생산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요즘의 세상에서 흙은 한낱 인간에 의해 이용당할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요사이 범국가적 차원에서 실시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매우 성공적인 정책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일들이 근본적으로 땅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하는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땅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명은 땅을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지 생명의 본질로 여기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달리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땅은 우리가 이용해야 할, 혹은 보호해 주어야 할 어떤 대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 자체다. 우리 인간은 그 땅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수천 년 동안 살아오던 땅을 거의 강제적으로 뺴앗긴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땅을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캐빈 코스트너가 감독하고 주연한 <늑대와의 춤을>이라는 영화에서 그 인디언들의 비극적 숙명이 잘그러져 있는데, 그들은 비록 반문명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문명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백인들보다 훨씬 세계와 인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흙에 삶의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형제와 자매로 여겼다. 그들은 맨발로 걷기를 좋아했고 대지에 그대로 눕기를 좋아했다. 돈으로 땅을 사고 파는 백인들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어느 인디언 추장의 다음과 같은 연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 사장,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 부족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에서 솟아오르는 수액은 우리의 붉은 얼굴 가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에 핀 꽃들의 수액,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이며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류시화 편역: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22쪽).
인디언들의 그런 신비하고 거룩한 체험을, 우리는 지금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것도 그 잘난 개발과 문명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인디언들의 세계 이해를 그저 정령숭배적이라거나 이방적인 것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땅에 대한 그들의 거룩한 체험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구약성경의 모세 전승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가시떨기가 불붙고 있던 호렙산의 한 구릉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이 작고 외로운 혹성인 지구, 그 땅과 그 흙,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근거이며 인간이 결국 돌아가야 할 이 땅은 거룩한 호렙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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