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다시 부활절을 맞이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음을, 그리고 우리도 마지막 때 부활할 것을 믿고 살아간다. 그런데 막상 부활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되면, 사람에 따라 약간씩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해도 누구나 멈칫거리게 된다. 그만큼 부활은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뛰어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을 열어 놓고 대화할 수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우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자.
우리가 언제 부활하게 되는가? 우리는 죽는 즉시 부활하게되는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떄 부활하게 되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즉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믿고 죽은 이들이 먼저 부활하게 된다고 쓴 걸 보면, 부활의 시기가 죽은 즉시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미루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부활의 시기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간을 계산하는 듯한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어떤 모습을 갖게 될까? 피부가 검은 사람은 검은 대로, 흰 사람은 흰 대로, 그리고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답게, 추한 사람은 추하게 부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체 장애자들이 부활의 세계에서도 역시 장애받는 지체를 갖게 된다면 그건 의로운 세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우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기질이나 성품 등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인데, 우리의 개인적인 정체성이 그대로 유지될지, 아니면 그런 개인적인 것은 상실되고 모두가 천사들처럼 한결같은아름다움을 갖게 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부활의 장소는 어디일까? 우리가 부활하여 살아가게 될 그 곳은 우주 공간 어디엔가 준비된 장소일까, 아니면 예수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시어 이 땅을 심판하시고 천년 왕국을 세우실 이 땅일까? 이 문제는 수학 공식에 대입하듯이 해답을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에서 언급된 몇 가지 질문들만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가 믿고 바라는 부활은 생물학적인 차원의 사건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갖고 있는 생물학적 조건을 가진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몸은 결국 다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부활이 고통과 죽음을 뛰어넘은 몸이라면 현재와 같은 몸의 상태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몸이라고 대답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부활은 과학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앙적인 사건이다. 부활은 지금 다시 실험실에서 반복 실험할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건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믿어도 된다거나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자세가 신중하고 바르다면 그 부활의 의미도 그렇게 될 것이지만, 이 세상의 삶의 유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경우에는 부활도 역시 그런 정도의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우리의 부활신앙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확고한 삶의 바탕에서 궁극적으로 고백되는 신앙이라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무엇이 참된 존재인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무상한 존재자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 자신과 그 주변 모든 세계는 시간과 함께 허물어지고 만다. 만약 부활의 세계를 이 땅에서 추구하는 삶의 확장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국 참된 존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항상 건강하고 죽지도 않으며 배고품도 없고 원하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잇는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부활의 세계를 평가 절하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참된 존재란 지상적 욕구가 영원히 보장되는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그런 것을 뛰어넘는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다. 그 생명의 세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다. 우리는 그 세계를 믿음으로 희망하고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그런 희망으로 무상하고 파괴적인 이 세상에 대항해서 싸울수 있다.
무엇이 생명인가? 참된 존재는 생명이며, 따라서 부활은 생명의 세계로 들어감을 뜻한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부활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달걀의 부화라든지 씨앗의 싹틈을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런 예가 부활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접근 시켜 주기는 한다. 달걀이나 씨앗은 움직임이 없지만 병아리나 새싹은 움직인다. 부활은 이렇듯 음직임이며 운동이고 변화다. 그것은 곧 생명이다.
2천 년 전 대제사장들과 총독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듯이 보였지만, 그 떄부터 새로운 움직임,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불일듯 일어났다. 예수님의 부활은 폭력의 질서인 이 세상에 사랑의 질서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듯 생명의 세계를 향해서 투쟁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죽은자들로부터 부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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