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겠지만, 70년 대 말 내가 전도사로 명덕교회 학생회를 지도할 때 학생들 중에는 간혹 '도사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었다. 그 호칭이 전도사(傳道師)의 축형인지, 아니면 도사(道士)의 언어 유희인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쪽이었든지 '도와 직면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교회 지도자를 지칭하는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전도사는 목사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간주되어, 가능한 빨리 전도사 딱지를 떼고 목사(牧師)로 불리기를 바란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그 호칭에 근거하여 교회 지도자와 복음의 정체성 문제를 진지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목(牧)과 도(道)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목사(牧師)의 목(牧)은 '소의 아버지'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돌본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 목사는 신자들을 잘 가르치고 관리하는 직책으로 이해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요 21:15)고 당부하셨던 말씀에 부응하는 자세다. 이에 비해 전도사(傳道師)의 도(道)는 자기 자신의 존재와의 관계,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는 말이다.
목(牧)은 신자를 먹이는 작업이며, 도(道)는 자기가 먹는 일이다. 교회 지도자에게는 이 양쪽의 기능이 모두 필요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도가 주변부로 밀려나고 오직 목만 그럴듯하게 행세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양들을 먹이려고만 했지 자기 자신이 먹으려고는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도가 없는 데 어떻게 목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내적인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있는 거 없는 거 다 빼내어 주다 보니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그래도 주어야 한다는 강박감 떄문에 안타까워하는 게 목사의 심정이다. 그런 소바간 마음이야 소중이 간직되어야 하겠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가는 목사의 정신 세계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길을 가리키는 도(道)의 한자 뜻을 풀어보면 흩날리는 머리카락, 걸을 때 한 팔이 뒤로 빠져나온 몸체, 그리고 걸어가는 앞발과 뒷발의 모습 옆에 머리가 붙어 있는 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도란 걸어가면서 생각하는 것, 즉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면서 옳은 길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도라고 하면 웬지 온갖 조화를 다 부리는 산신령들이 하는 엉뚱한 짓거리로 치부되곤 한다. 이 세상 일에 초연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은둔주의, 냉소주의, 패배주의, 도피주의처럼 보인다.
이 자리에서 구태여 노자와 장자 운운 할 필요도 없이 도는 위의 한자 풀이에서 설명되었듯이 옳은 길을 찾을 뿐만 아니라 옳은 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이다. 인간의 사변적 인식만이 아니라 행함도 포함되어 있는 우주론적 세계관이다.
도는 원래 동양 사상의 형이상학으로서 만물과 만상의 기초라 할 수 있는데, 서양 철학적 언어로는 존재이며, 성경적 전통으로는 진리, 생명, 구원, 그리고 로고스와 호도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도는 그 어떤 것과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절대 세계이며 모든 현상의 근원이다. 이것 없이는 그 어떤 것의 존재도 가능하지 않는 궁극적 근원이다. 그런 길과 구도(求道) 자체가 바로 도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도는 구원의 존재론이라고 보아도 좋을 성싶다. 무슨 말인가? 기독교적 구원은 운전면허 획득이나 음악회 입장권 구입과 같은 정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참여하는 과정으로서의 동력적 사건이다.
구원은 그만큼 인간에게 절대 절명의 사건이며 시간이며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구원을 희망하는 자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빌 2:12) 나가야 한다. 이것을 보편적 언어로 말하자면 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오늘의 현실 교회는 구원의 도에 직면해 있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교회는 우선적으로 자기구원을 위해 진력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온갖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복음을 판매하면서 기실 구원의 존재론에서 멀어져 있다면 참으로 딱한 일이다.
특히 교회 지도자인 목사는 항상 남의 구원(교회 성장)에 온 마음을 쏟아 버리기 때문에 정작 자기 구원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목사는 남을 구원하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의 구원에 투철해야 한다. 그래야만 목사는 목사다워질 수 있고,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으며 그의 목회 행위들이 구원론적으로 바르게 실천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목사의 목사됨, 교회의 교회됨은 무엇인가? 그것이 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도를 따르는 자들은 유와 무를 초월한다. 자기를 비우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 구원 기관인 교회와 구원 선포자인 목사의 됨됨이가 놓여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랬다. 그들은 직업을 버렸고, 친구를 버렸고, 심지어는 부모를 버렸다. 결국은 자기 자신도 버린 셈이다. 그들은 모든 걸 툴툴 털어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신했다. 그들이야 말로 도사였다.
그 도를 아는 자들은 흡사 값진 진주를 발견한 진주 장사, 혹은 보물이 묻힌 밭을 발견한 농사꾼의 황홀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이런 기쁨과 자유와 평화의 내적 세계를 알기 떄문에 사소한 이해 타산에 민감하지 않고 살아간다. 작은 교회라고 해서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큰 교회라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된다. 그런 것은 너무나 하잘 것 없는 차이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목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자기 구원에 의존하여 존재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교회를 섬기는 치열성이 바로 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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