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진술로 시작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놀라운 증언이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언어(말씀)일 수 있는가? 요한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했을까? 쮜리히판 성경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언어는 신적인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증언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들의 증언도 이와 같은 지평의 진술이다. 이처럼 신구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언어와 존재를 일치시키려는 언어 존재론적 사유 방식은 2천 년 서구 기독교 사상사를 관통하고 있다.
마틴 하이덱거 같은 이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내용을 담는 형식, 즉 존재의 인식론적 틀을 의미한다. 존재는 언어라는 인식론적 틀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존재와 인식은 구별될 수 있긴 하지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인식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고 인식은 존재에 의존되어 있다. 이 존재와 인식의 상호성이 바로 서구 사상의 사유 방법론적 구도였다.
하이덱거는 인식행위를 언어적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언어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인간과 역사와 사물, 그리고 우주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또한 존재론적 근거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건을 놓고 생각해 보자.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의 대자보 사건이 위대한 교회사적 사건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건이 인간의 언어(말이나 글)로 전달되고 전승되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언어화되지 못했다면 종교개혁 사건은 없는 거나 진배없다는 말이 된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사건이나 프랑스 혁명, 우리의 8.15해방도 역시 그러하다. 이처럼 서양인들은 모든 사건과 모든 사물이 언어로서 존재론적 근거를 획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분석하고 논증하고 변증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진리에 이를 길이었다.
이에 비해 동양 사상은 약간 다른, 아니 엄청나게 다른 길을 걸어왔다. 언어라는 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 즉 사물과 존재를 분석하거나 언어화하지 않고 그냥 뛰어넘는다. 따라서 논리학이 아니라 직관과 깨우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장자의 제물론에 보면 언미시유상(言美始有常)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충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말은 사물에 따라 나오는 것이므로 일정함이 없기 때문에 별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사물의 구별을 말로 하지 않고 마음속에 모든 걸 품는다고 한다. 이처럼 동양 사상은 어떤 사물과 사건을 이리 저리 파헤치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으므로써 근본적으로 말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을 같은 패러다임 안에서 비교한다는 것은 어설픈 작업일지 모르지만, 양측이 모두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다시 한 번 요약해서 말하자면, 서구 사상은 언어를 존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동양 사상은 그걸 아예 무화시켜 버린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서양 사상의 옷을 입고 있다. 이는 언어를 가장 중요한 존재 인식론적 근거로 간주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나님을 초월적으로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전달은 여전히 언어를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언어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고자 했던 기독교 전통은 정당하다.
그런 전통의 신학화가 다름 아닌 바르트의 '말씀 신학'이다. 그는 신학이란 인간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을 논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주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말씀 신학'이란 것도 역시 서양 사상사의 중심인 언어 존재론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언어(말씀)를 강조한 탓인지 바르트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도 좀처럼 읽어 내기 힘든 <교회 교의학>을 9,185쪽이나, 그것도 아주 촘촘하게 써 내려갔다.
한국 교회도 서구의 이러한 언어 중심적 사유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지나치게 치우쳤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안타깝게도 서양사상사의 언어 존재론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쓸데없이 말을 많게 한다는 뜻이다. 말이 많아도 넘치게 많아서 언어의 홍수를 이루었고, 그 말이 우리 교회의 교회됨(존재)을 혼란스럽게 흔들어 놓았다. 흔히 목사는 말을 잘해야 한다고 하지만, 어눌한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사실 모세나 바울은 말에 서툴렀던 것 같다) 너무 말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매번 목사 취임이나 장로 장립, 혹은 헌당식 같은 교회 행사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말로 된 순서가 너무 많다.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설교, 권면, 축사, 답사 등이 겹치기로 이어진다. 내용도 한결같이 설교조다.
이러다 보니 한 번 행사에 네다섯 편의 설교를 듣게 되는 형편이다. 어쩔 수 없이 행사를 위해서 필요한 경우가 있긴 하겠지만, 그런 순서들이 지나치게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면서 사실은 사람을 위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과 구원과 사랑과 진리를 증거해야 할 우리가 습관적으로 말을 헤프게 사용하다 보니, 말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 최소한 언어를 자기 존재의 집으로 여긴다면 언어의 통제, 언어의 압축, 언어의 집중과 절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동양인인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동양적 사유를 배워야 한다.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세계는 신화나 정서며, 또한 정의, 평화, 사랑, 즉 바른 삶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우리는 말의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바울도 이르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고 하였는데, 그 능력은 말재주가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는 바른 삶을 뜻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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