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에는 서울에도 백화점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신세계'와 '미도파'뿐이었다. 거의 모든 상거래가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그리고 동네마다 들어서 있는 재래식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그 당시 백화점과 재래식 시장의 차이란 정찰제에 달려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백화점에서는 정찰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소위 바가지를 쓰지 않고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재래식 시장에서는 흥정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이었다. 물건 값을 깎는 맛에 사람들은 재래식 시장을 좋아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재래식 시장은 손님을 잃기 시작했고, 오히려 백화점이 모든 도시의 상권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소비문화의 확장이 그에 대한 대답이다. 백화점은 인간에게 소비의 멋을 넘치도록 제공하였고, 인간은(주로 도시인) 이를 즐기는 데 익숙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물품의 다양성이다. 고객들은 백화점에서 모든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백화점에서는 식료품에서부터 전자제품이나 가구, 혹은 의복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생산해 내는 거의 모든 상품이 준비되어 있다. 이러한 물품의 다양성은 편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도시의 바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게 바로 본질적인 것이지만, 고도의 판매기술과 전략이 인간의 구매 충동을 과하게 부추긴다는 점이다. 백화점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나 진열 방식을 통해서 그 상품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높여준다.
고객은 일단 가시적으로 그 상품의 가치에 동의하게 된다. 스스로 상류층, 혹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이런 고급스러운 매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므로써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물품을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판매 기술로 말미암아 소위 '충동 구매' 까지 유발시킨다.
이러한 역학작용으로 백화점은 모든 도시인들의 삶을 소비지향적인 삶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백화점들은 고객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웠고, 도시인들은 그들에게 자신을 맡겨두므로써 일류 시민(귀족)이라는 대리 만족을 경험하게 되었다.
곳곳에 가격 파괴 체인점이 세워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도 소비 충동적 백화점과 소비지향적 도시인들의 관계를 청산시킬 수 없으며, 앞으로도 백화점은 유통업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백화점이 갖고 있는 물품의 다양성과 풍성함, 그리고 소비지향적인 판매 전략은 가장 전형적인 자본주의 경제 형태를 보여준다.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꽃이다. 백화점은 인간에게 무한한 물품을 제공해 주었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행복과 미덕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가끔 북의 귀순자들이 남한의 백화점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기사를 보게 된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물건들이 백화점에 쌓여 있는 걸 보고 그들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힘 앞에서 백기를 드는 것이다.
어느 사회가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내어 많이 소비하고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체제의 우열을 나눈다면 이런 귀순자들의 단순한 논리가 들어맞는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상품의 생산과 소비보다 중요한 가치에 의해 작동되어야만 참으로 인간적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 그 가치란 정의와 평화, 사랑과 희망이 아닐까 생각된다.
굳이 성경적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이다. 이런 가치가 상실되고 백화점의 고도화된 판매 전략과 도시인의 무분별한 소비 패턴이 인간 사회를 움직여 나간다면 아무리 풍요로운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고품질의 행복을 제공할 수는 없다. 생산과 소비와 유통,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한 경쟁심만이 증폭될 뿐이다.
김민웅에 의하면 "존 워너, 메이커, 마샬, 메이시 등 미국의 백화점 발전사를 정리한 윌리엄 리치는 자본주의적 자유의 성취를 가리켜 욕망의 민주화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왕실과 귀족, 혹은 고급 성직자만이 고급의 건축물을 소유하고 즐길 수 있었지만, 이제 유럽식 성채 같은 백화점으로 인해 일반대중들도 그런 특권계급에 속하게 되었다는 말이다(한겨레 21.67호).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귀족의식의 대중화가 얼마나 탄탄한 내부의 이성적 합리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백화점은 아주 단순하게 대중 고객들을 자본의 위력 앞에서 자신을 비하시키거나 아니면 자본의 욕망에 빠져들데 만들 뿐이다.
백화점식 유통 질서에서 그 전형을 드러내는 자본주의는 자본을 중심을 한 경제 이념이며 질서다. 모든 국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기독교 국가와,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무신론 국가와 관련되어 있다.
막스 베버의 분석에 의하면 칸빈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성직만이 아니라 세속 직업도 하나님의 소명으로 인식하게 되어 노동을 신성시했으며, 그 결과 자본이 축적되었고 그 축적된 자본이 생산성을 높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과연 자본주의를 친기독교적인 경제 질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자본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건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반기독교적인 것도 아닌, 그리고 윤리적 가치나 영적 가치도 없는, 인간의 문화일 뿐이다.
인간의 문화가 사용에 따라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는 것처럼 자본이라는 문화도 선하게 제어되어야만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문화를 다스려 나가야 하는 인간의 변화이다. 선한 인간에게 돈은 선하게 사용되고, 악한 인간에게는 악하게 사용되는 것처럼, 인간 변화와 인간 혁명이야말로 자본에 앞서는 작업이다.
그렇다. 교회는 부의 획득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이며 성공의 유일한 잣대로 삼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허물어 버리는 데 앞장 서야 한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인간론에 근거한 공산주의의 유토피아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를 악몽처럼 휘감고 있는 자본 지상주의로서의 자본주의, 그런 자본 논리와 상품 논리를 교회가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간파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그런 자본 논리를 오히려 부추기지는 않았는가? 70,80년 대 한국 교회의 놀라운 고속 성장은 자본 논리의 유혹에 영합한 결과는 아닐까? 이제 90년 대 중반에 이르러 교회성장 지수가 정체 내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는 사실과 최근에 연발하고 있는 대형사고,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 사이에는 어떤 상징적인 연관성이 없을까?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지난 6월 29일 서울 서초동 삼풍 백화점이 무너져 내려, 사백여 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에 이르는 실종자, 천문학적 경제 손실, 거기에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백성들은 막대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그건 화려한 몰락이었다. 건축된 지 6년밖에 되지 않은 초현대식 백화점 건물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는 건 불가사의다.
지금까지 모아진 대충의 의견은 부실공사와 잦은 설계 변경과 건물 구조에 대한 진단도 없이 무리하게 내부 시설을 한 점과 세련미를 중심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거기에다가 건축인허가와 관련한 구청과 서울시 담당자들의 뇌물 공여가 관여되었다.
사고 당일에도 오전부터 붕괴 징후아 뚜렷이 나타났지만 백화저 관리자들은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풍백화점의 주인인 이준 씨가 기독교 학교인 숭의여전의 이사장이며, 영락교회의 안수 집사라는 사실에,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또다른 낭패감에 젖게 된다.
이런 총체적 부조리가 이번과 같은 미증유의 사고를 발생케 했다. 이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당연한 결과였을까? 이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 불의가 난마처럼 얽혀져서 빚어낸 인재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구사회의 몰락>을 쓴 슈팽글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본 지향적 이데올로기의 몰락을 보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성경은 자본 논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애굽에서의 400여 년에 이르는 종살이는 두말 할 것도 없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민으로 거칠게 살아오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정착한 후 가나안의 농경신이었던 바알숭배의 유혹을 받았던 유대인들에게 예언자들은 가혹할 정도로 요구를 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들을 바알로부터 분리해 내기 위해 가나안 원주민들과 아예 상종하지 말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대 백성들과 왕들은 예언자들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가나안의 농경 축제가 제공하는 탐욕과 자본의 논리에 젖어들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겸하여 바알을 섬기는 게 그들에게는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그리고 재미있는 현실적 대안이었다.
우리는 3천 년이 지난 오늘 새로운 바알 문화와 대결하고 있다.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자본 논리에 깊숙이 빠졌다. 우리가 지금 3천 년 전 가나안의 바알에 빠져들었던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바라보고 있듯이 우리의 후손들은 오늘의 우리를 그렇게 바라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경제 질서를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의 상대적 우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를 우리는 경험했다. 다만 이 경제 질서가 자기 신화에 사로잡혀 삼풍백화점처럼 처절하게 몰락하지 않고, 최소한 사회주의적 이념이 적절히 보충된 서유럽식 '사회주의적 자본주의'로 승화되어, 천민 자본주의 성격이 다분한 이 사회의 질병을 고쳐 나갈 수 있도록 성경적 대안을 찾아 나서야겠다.
이런 끊임 없는 담론이 오늘 21세기를 코앞에 둔, 하늘 나라의 경제 질서를 바라보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일종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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