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젊은 남자라면 누구나 프로 야구를 직접, 아니면 최소한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라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요즘에는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이런 운동 관람을 즐기는 것 같다. 젊은 연인들이, 혹은 젊은 부부가 아기까지 데리고 운동장에 나와 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텔레비전 화면에 잡히곤 한다.
4월에서 10월까지가 프로야구 시즌인데,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경기가 열린다. 주말에는 두말 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괜찮은 게임일 경우 만원 사례가 되곤 한다. 몇 시간 전에 미리 나와 예매해야 하고, 그것도 안 될 경우 암표를 사야 하는 실정이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드는 것일까? 첫 번째 대답은 '재미'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 야구가 재미 있으니까 무지무지한 노력을 해서라도 관람하려고 한다. 재미란 게 반드시 프로야구에만 있는 건 아니다. 프로 축구도 그렇고, 농구나 배구도 그렇다. 교향악단의 연주나 오페라도 재미 있다. 연극이나 영화도 그렇고, 등산이나 낚시도 그렇다. 그런데 프로 야구에는 별다른 재미가 있다.
모든 단체 스포츠가 다 그렇긴 하지만 야구는 특별히 선수 개개인보다는 전체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야구 감독의 작전이 승패의 관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축구 경기나 배구에도 감독의 영향력이 크지만 야구는 매순간마다 감독이 결정해야 한다. 1번 타자가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을 때 2번 타자에게 번트를 시켜야 할지 치고 달리도록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수비측에서도 이런 작전을 간파하고 투수에게 볼을 빼게 할지 번트하도록 맞춰 주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장면이 한 회에도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관람자는 자기의 생각과 감독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야구의 재미를 배가로 증폭 시킬 수 있다.
이런 야구의 묘미만으로 지금처럼 프로 야구가 인기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게임 외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한다.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이며 정신인데, 야구를 상품화한다는 말이다. 선수들을 스타로 부각시키고, 치어걸을 등장시켜 남자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치어걸들의 야한 차림과 몸놀림은 프로야구를 상품화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장식품이다.
사람들이 야구 경기장을 찾는 이유는 이외에도 심리적인 부분도 작용한다. 그 곳에 가는 이들은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므로써 정신적 소외감을 해소한다. 많게는 삼만 여 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소리지르고 웃고 박수를 치면서 세 시간 가까이 일체감을 느끼다 보면 사회생활 속에서 찌들렸던 감정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10대 소녀들이 연예계 스타들의 콘서트에 참석해서 광적으로 울부짖는 것과 약간 형식을 달리하고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현대 사회의 현상과 시대 정신이 과연 우리 인간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건지 확실하지는 않다. 제 3세계에서는 독재자들이 소위 3S(Sex,Screen,Sports), 즉 섹스, 영화, 스포츠로 우민정책을 펼친 게 사실이다. 지금은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우리도 그런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이런 걸 감안한다면 백성들을 순전히 재미에 빠져 살게 만드는 정치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오락문화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지나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노라 하는 대기업도 외국 영화사와 제휴 내지 합작으로 영상산업에 뛰어든 걸 보면 돈벌이가 짭짤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케이블 텔레비전이 현실화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통신위성을 통한 다채널 방송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가 되면 이런 오락과 재미문화는 더욱 극대화 되리라고 생각된다.
프로 야구와 같은 오락문화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무엇을 전해야 할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주일에도 프로 야구를 관람하기 위해 아침부터 점심 싸 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교회에 나오라고 말해야 할까? 이건 프로 야구만이 아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 교인들의 출석율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다. 신자들이 이제는 교회보다 더 재미난 곳을 찾기 시작했고, 재미란 면에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교회가 아무리 경쟁하더라도 프로 야구만큼의 재미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며 따라서 벌을 받게 된다고 은근히 겁을 줄 수도 없고, 또한 독일에서 수억 원 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들여오고 멋진 성가대를 구성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붙잡아 둘 수는 없다. 점조직으로 그런 일을 달성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런 여흥적 삶이 점차 고조되어 확장되고 있는 지금, 교회가 선택할 대안은 없는가?
교회는 교회만의 일을 해야지 세속문화와 대결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아무리 교회당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축한다고 하더라도 세속 건축물을 압도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축소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슬프거나 억울한 일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영역 확장을 위해 세계와 투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계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그래서 작은 모습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만 21세기에도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
세계를 위한 교회의 봉사란 구제나 구호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는 세계의 질서와 구조를 구원론적으로 갱신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이를 메시아니즘이라 부른다.
모든 세속 세력과 조직으로 하여금 참된 구원의 차원, 즉 정의와 평화에 직면하여 살도록 요청하고 강권하는 공동체가 되므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기관이 될 것이다. 그럴 떄만 이 세상은 프로 야구의 재미에만 빠져 살이 않고, 발길을 돌려 교회가 외치는 예언자적 메시지를 경청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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