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어느 신문에서 토막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글은 사형수를 중심으로 한 영화 이야기였다. 배역도 화려하고 연기도 그 명성에 걸맞게 감동적이었다는 그 영화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을 경고하는 듯 보였다. 마지막 장면이 그 영화의 대미이며 압권이라고 한다.
사형수들은 자기의 사형 집행일이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배려인지 아니면 더 잔혹한 고문인지 모르겠지만, 사형수들은 매일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자리에 누웠을 때에야 그 날 하루도 생명을 연장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자기 이름이, 혹은 번호가 불리울 때마다 이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인지 모른다는 절망이 그들은 사로잡는다.
아무리 본인의 죽는 날짜를 정확히 모른다 해도 자기가 죽는 날이 되면 그 날을 맞이하는 느낌과 교도관의 다른 분위기 때문에 그 죽음을 거의 정확하게 느끼게 된다. 이름이 불리운 이후 목사나 신부, 혹은 승려들을 통해 종교의식을 가진 다음, 그의 목은 밧줄에 감겨 숨을 끊게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마 주인공이 여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끌고 가던 교도관이 사형수를 위로한다는 뜻으로 죽음의 순간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형수는 잠시 교도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죽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소?"
죽음이라는 것보다 우리 인간에게 더 확실한 사실은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것보다 우리 인간에게 더 잘 잊혀져 있는 것도 없다.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죽음의 길로 쏜살같이 달려가면서도 그것을 까맣게 잊거나 모른 체하기도 한다.
인간이 다른 일반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식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은 존재하면서도 끊임없이 비존재의 위협을 당하며 살아간다. 그런 일은 우리가 아는 한 다른 동물들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아무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만 살아있다는 사실이 확실한 것이지, 죽음이 없다는 살아 있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려면, 특히 인간으로 살려면 죽음 앞에 항상 직면해 있어야 한다.
창세기의 말씀도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죄로 인한 죽음, 그리고 인간의 살인 이야기가 성경의 머리말이다.
왜 유대인들은 그런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작하고 있는가? 그것은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삶과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진 주제이다. 사는 게 우리에게 중요하다면 그만큼 죽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죽음을 포함해서 그것 전체는 생명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택하셨을까? 십자가는 다름 아니라 죽음을 뜻하는 것, 바로 그 죽음이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음을 택하셨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다. 죽음으로 생명을 취한다는 이 신앙은 정말 신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은 거의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는 자가 살겠고, 작은 자가 큰 자가 되겠고, 어린아이 같은 이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그 분의 말씀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을 알고 거기에 참여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죽는다. 이 역설, 이 변증법, 이러한 신앙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부활에서 맛본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부활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은 거의 하나의 사건에 속한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을 고난 주간으로 보냈다. 예수님의 고난,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 바울도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바울의 이 고백은 종교적인 독선이 아니라 ㅊ마된 생명의 본질에 대한 확신이다. 인간은 고난과 죽은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생명에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앙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부당하게 취급당하는 것은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은 삶 속에서 현실화시키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지는 3월 31일 오랜만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뉴스를 들었다. 며칠 전 과로로 뇌사 상태에 빠진 젊은 의사의 장기가 다섯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쓰여졌다는 소식이다. 장래가 유망하던 젊은 의사가 뜻하지 않게 뇌사 판정을 받았고, 거의 아버지의 결단에 따라 이 일이 이루어졌다. 한 생명은 죽었지만 그러 인해 다섯 명의 생명을 건졌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문화는 너무도 사는 것에만 치우쳐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도 풍부하게 잘 사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다. 죽음을 제쳐 놓고 어떻게 삶을 말할 수 있는가? 사는 것이 곧 죽음의 연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잘 사는 것만이 아니라 잘 죽는 것을 포함한 통전적인 생명의 문화를 오늘 다시 회복해야만 인류의 미래는 전향적으로 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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