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 되는 가르침의 의미를 갖고 있는 종교는, 만약 올바로 접근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만족을 제공한다. 많은 종교인들이 철저한 고행이나 수행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서 절대적인 행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무역이나 선박 제조 기술은 물론이고 법학과 철학도, 그것을 통해 인간이 구원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그런 것에 실존적으로 의존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컨대 무역회사 사장은 그 일의 선과 악을 떠나서 얼마든지 상품을 판매할 수 있고, 변호사들은 불의한 사건일지라도 변론할 수 있으며, 철학 교수들은 그 철학의 진실성 여부에 관계 없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자기가 언급하는 그 내용에 철저하게 의존시키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종교지도자들은 끊임없이 행함에 앞서 깨달음을 완성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존재가 행함에 앞선다는 말이다.
물론 존재와 행함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존재로부터 행함이 발생하며, 행함으로부터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자면 나무가 좋아야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또한 좋은 열매를 보고 좋은 나무를 알 수 있다. 이 가르침이 뜻하는 것은 나무와 열매가 동시에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여래가 철저하게 나무에 의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존재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우리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과 연관된 반사회적 사건들을 목도하였다. 서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로 어느 정도 해결의 가닥을 잡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조계사 안에서 벌어진 암투와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불교의 총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조계사가 일약 소림사의 무술 연습장을 방불케 하였다. 소위 진리를 위해 출가한 승려들 사이에서 더구나 평생 동안 정진 수행한 고승들이 즐비하게 모였음에도, 쌍방 간에 대화와 해결의 모색은커녕 정치인들처럼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세력 규합에 힘을 쏟았고 세력이 불리하다고 직감한 쪽이 뒤로 물러섰다.
이번 사태에 대해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메스컴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의현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측은 비록 도덕성에 흠집이 갔지만 교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텼으며, 반면에 개혁측은 이번 기회를 불교 개혁의 적기라고 생각하여 초법적으로 승려대회를 여는 등 여론을 등에 업고 힘으로 밀어붙였다.
이번의 사건은 단순히 조계종 교권을 서로잡으로는 내분이라기보다는 그 동안 정치와 결탁해 온 조계종의 개혁을 위한 투쟁이라고 불 수도 있다. 정진 수행을 삶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 그들에게서 왜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는 걸까?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개혁 세력에게 묻고 싶은 것은 아무리 총무원 쪽에서 불법적 행태를 보일지라도 강제력을 동원해서까지 접수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점이다. 총무원 쪽에 질문하고 싶은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정치적으로 장기 집권을 기도하는 가 하는 점이다.
이 자리에서 양비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는 집단과 방법상의 문제를 갖고 있는 집단 사이를 구별해야 하지만, 승려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생각한다면 구태여 이렇게 구별한다는 것이 가소로운 것 같다.
이번 사건이 정치권에도 파장을 일으키는 이유는 동화사의 통일대불 시주돈 80억 원의 행방 때문인가 보다. 그 돈이 정치권에 러 들어갔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불상 건립을 위해 80억 원을 시주하는 불자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그 불상 건립에 총 150억 원 가까이, 혹은 그 이상 소요되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불교 신자들에게는 실례인지 모르지만 그런 불상을 만든다고 통일이 되는가? 그 돈으로 양로원이나 도서관을 짓든지, 아니면 경북의 낙후된 지역에 공설운동장을 건설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가? 이러한 행위는 어디에 연유하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했기 때문에, 혹은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을 "밭에 감추인 보물을 발견한 자"의 삶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한 싸움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교권을 위한 힘겨루기에는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더 나아가 진리를 위한 투쟁이라도 상대방을 파괴하는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신앙이란 어떤 조직을 확장하는 행위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신앙은 어떤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교회 확장, 그것을 위한 여러 행위, 때로는 선할 수도 있고 때로는 악할 수도 있는 그러한 행위 자체가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 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역으로 작용한다.
이 이야기는 타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사실 불교만 탓할 일은 결코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나 많이 싸웠는가? 간혹 똥물을 뿌리거나 멱살잡이 사건이 교회안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남의 눈속의 티끌보다도 우리의 대들보가 더욱 심각한 실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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