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온 세상이 월드컵 축구 열기로 가득하다. 아마 하나님도 인간들의 월드컵 축제를 보시면서 재미있어 하지 않으실까 생각할 정도다. 올림픽 회원국보다 월드컵 축구 회원국이 많다고 하니 축구가 얼마나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운동인지 알 만하다.
축구는 지금까지 유럽과 남미를 두 축으로 해서 발전해 왔다. 역대 우승국들이 거의 이 양 대륙에서 나온 것만 보더라도 세계축구의 주도권을 어느 지역에서 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브라질과 독일은 월드컵을 3회씩이나 우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우리 나라는 연속 3회 본선 출전이라는 그럴듯한 명성을 자랑하지만 그런 나라들과의 실력 차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유럽과 남미의 나라들은 프로 축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있다. 특히 유럽은 아주 더운 여름 한 철만 제외하고는 사계절 내내 프로 축구시합이 열린다. 국내 시합만이 아니라, 각국의 우승과 준우승 팀이 모여 유럽의 챔피언을 뽑는 시합도 있다.
독일만 해도 내가 아는 바로는 1부 리그 팀이 열 여덟 개 정도 되고, 2부 리그가 또한 그 정도의 숫자가 된다. 매 주말마다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시합을 치루는데, 홈에서 열리는 경우에는 응원하는 사람들은 생각해서인지 선수들은 더욱 승부에 집착한다.
우리는 통신망의 발전으로 미국 전 지역에서 열리는 월드컵 축구를 안방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다. 4,5만 명, 때에 따라서는 7,8만 명 관객이 가득 찬 축구 경기장은 두 시간 가까이 오직 선수들의 뜀박질과 발길질, 그리고 구경꾼들의 환호만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모인 선수와 응원단과 감독들 모두가 일체가 되어 축구 축제에 빠져든다.
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축구 시합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간혹 인기 스타들의 공연장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축구장에 모인 군중들의 엑스타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일종의 구원 경험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구원이다.
인간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러한 엑스타시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벌써 2천 년 전에 이러한 집단적 초월 경험을 만들기 시작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투우사들의 격투기를 보며 로마 시민과 귀족들, 그리고 귀족 부인들까지 짜릿한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평소에는 시를 읽으며 혹은 연극을 보며 눈물을 찔끔 찔끔 흘리던 부인들이 격투사들이 죽음을 걸고 싸우는 시합을 보고 환호했다는 것은 인간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 나라에도 프로 축구와 프로 야구가 있다. 라이벌 끼리의 시합이 있는 경우 경기장은 입추의 여지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 집안에서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 데도 그 많은 사람들이 굳이 경기장에 나오는 이유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경기장엔 안방에 앉아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 즐거움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림으로 보는 것보다 선수들의 뛰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이 더욱 실감이 나기 때문에 경기장에 나간다고 볼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함께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군중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선수들이 아니라 구경꾼 때문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시합이라도 관중이 적으면 별로 흥이 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월드컵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어떻게 선포해야 할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형식은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구원 형식이 갖고 있는 구원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교회는, 축구장에 나가서 열광하는 것과 동일한 기분으로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할 만한 구원의 내용이 준비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일종의 구원론이다.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젊은 남녀의 사랑이나, 정치가들의 정치 행위, 예술가들의 예술 활동, 그리고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은 구원을 지향한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구원의 경쟁시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을 강압적으로 전할 수는 없다. 중세기 때처럼 교회에서 세례 받는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원의 존재론은 오늘의 세계 이해, 사물 이해, 본질 이해와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물처럼 인식되는 분이 아니라 일종의 힘으로 설명되는 분이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성령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전제 조건 가운데서 구원을 언급해야만 한다.
구원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유와 기쁨과 평화와 정의 같은 영역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교회가 외치는 구원이 이러한 내용들을 얼마나 담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현대인들이 월드컵 축구에 몰두하면서 경험하는 열광과 자유와 비교하여 교회에서 제공하는 자유와 기쁨은 어느 정도인가? 이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구원의 형식과 내용을 재검토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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