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 지은이가 막 두 돌이 되었을 때라고 생각된다. 그 날은 그 아이의 언니인 지예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늘상 하는 대로 생일 축하 노래는 부르기 위해서 축하 케익에 촛불을 붙였다.
그 촛불은 우리들에게 일상적인 사물에 불과했는데, 지은이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그 촛불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얼굴에는 전혀 새로운 사물을 처음 접하게 된 인간의 호기심과 경외감으로 가득 찼다.
내가 과장되게 보았는지 모르지만 그 아이의 눈빛, 그 아이의 얼굴빛, 그리고 입술가에 퍼지는 묘한 표정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아이의 놀람과 기쁨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불을 경험하게 된 고대인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번개가 치든지 아니면 고목나무가 넘어지면서 발생한 불길을 처음 본 인류의 조상은, 그 불이라는 존재 앞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 동안 경험했던 사물과는 전혀 다른 사물을 보고, 그들은 감히 두려워서 접근하지 못하다가 차츰 그것과 친숙해지면서 구석기 시대 때부터 불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결국 불은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약간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지만, 인간은 자기의 일상적인 경험을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성숙해 갈 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사적으로도 역시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한 사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물질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물을 사물로만 보지 말고 그 사물의 존재를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세계는 새로워질 것이다.
아마 하이덱거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되는데, 철학의 기초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라는 것이다.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찾아나서는 일이 아니라, 그 무엇을 있게 하는 근원적인 존재를 문제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의 사유를 여기서 풀어 설명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지만, 그가 존재론의 차원을 끌어올린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다시 지은이의 경험을 통해서 말하자면, 그 아이에게 촛불은 그저 단순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제 두 해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 동안의 일상적인 경험을 뛰어넘는, 그 어떤 존재를 경험하는 사건이었다.
인간만이 자기와 그 주변의 존재에 대해 숙고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인간론은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존재를 얼마나 인식하느냐에 의해 규정된다.
언젠가 시인 고은 씨가 텔레비전 대담에 나와서 자신의 지나온 인생 여정에 대해 말하는 중에, 어느 한 시기에 존재에 대한 심한 회의에 빠진 적이 있다고 술회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물의 존재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느 한 인간이 그 시간에 그 곳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날 평소에 문단의 대선배로 모시고 있는 서정주 시인 집에 어느 문우와 함께 갔었는데, 그 곳에 그렇게 점잖게 앉아 있는 서정주 시인이 그 날따라 참으로 우스꽝스러워 보였다고 한다.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앙천대소하였다. 서정주씨는 갑자기 자기를 보고 웃어제끼는 고은 씨가 이상스러웠다. 고은 씨는 쉬지 않고 웃었다. 서정주 씨는 "그만 웃으시게나"라고 타일렀지만, 고은 씨는 막무가내로 웃었다. 참다 못한 서정주씨는 고은 씨를 쫓아 내고 그 이후로는 문전에 얼씬하지도 못하게 했다는 일화였다.
고은 씨의 말인즉슨 자기가 억지로 웃거나, 서정주 씨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곳에 앉아 있는 서정주라는 그 존재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왜 그 곳에 저렇게 존재하는가? 그는 왜 그런 모양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왜 그일 수밖에 없는가? 비록 고은 씨가 불교적인 사유를 하고 있긴 하지만 존재에 대한 그의 천착은 가이 존경받을 만하다.
우리는 너무도 일상적인 사물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다. 태양과 달과 지구와 강과 산, 그리고 강아지와 수박과 인간, 또한 바위와 모래와 나무가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의 질서 속에서 우리는 결국 삶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런 질문도 제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사물 속에 내재해 있는 존재와 생명의 다이나믹을 끌어내지 못한다. 오늘의 소비지향적인 문화 패턴은 사물을 사물로서만 이해하려는 비사유 인간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도 사실은 이러한 존재론과 인식론에 근거한 작업이다. 만약 하나님을 반드시 그 곳에, 그리고 그렇게 있어야만 되는 일종의 일상적 사물로서 이해하고 만다면, 그런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적 능력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라 헬라 신화의 주인공처럼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인간을 엑스트라로 사용하는 신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촛불이 어느 사람에게는 그저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존재 자체에 접군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 이해를 우리는 존재론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칼 바르트가 <복음주의신학 입문>에서 신학적 실존을 "놀라움"이라고 피력하고 있는 것이나 에크하르트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에 대한 이해는 옳다.
존재 자체 앞에 서게 되면 인간은 그저 놀랄 뿐만 아니라, 그 놀람에 기초해서 점차적으로 그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일상성, 우리 신앙의 일상성으로부터 시시때때로 자유로워지고 벗어나서 그 낯설음에 직면해 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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