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는 불의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하여 고리대금업을 하던 어떤 노파를 해충으로 간주하고 도끼로 찍어 살해한다.
법학도로서 살인이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모를 리 없었던 그는, 초인의 윤리에근거하여 자신의 행위가 사회 도덕율이나 실정법을 초월한다고 확신했다.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 또 다른 불의를 감행한 자기 모순을 억지로 합리화하던 그를 구원한 것은 벌이 아니라 몸을 팔며 살아가던 어떤 여인의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이었다.
<죄와 벌>에서 라스코리니코프가 주장하던 그 공허한 논리가 시공을 뛰어너어 노르 우리의 주변에서도 외쳐지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세상과 인간과 역사와 존재에 대해 알기에는 너무도 어리디 어린 스무 살 언저리들의 청년들이 조직한, 그리고 어느 고승의 법명처럼 들리는 지존(至尊)파 사건이 지난 추석 연휴에 가족끼리 덕담이나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우리의 가슴을 분노와 허무로 갈갈이 찢어 놓고야 말았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던 그들은, 같은 나이 또래의 야타족을, 사실은 이들도 역시 겁없는 아이들이지만, 없애지 못하고 잡히게 된 것이 무척이나 억울한 것 같았다.
반인간적인 행태는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인천시 북구청 세무와 직원들의 세금착복 사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전혀 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안방까지 흘러든 지존파의 엽기적이고 광기적인 행위와 저들의 얼굴에 순간 순간 스쳐 지나가면 냉소, 그리고 가짜 영수증을 떼어 주고 천문한적 금액의 세금을 자기 주머니에 넣다가 발각되었지만 그랜져 승용차를 타고 변호사와 함꼐 검찰에 출두하던 그들의 그 후안무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실상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어느 사회이건 강력 범죄나 파렴치한 행위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는 반사회성의 증후군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총체적 위기를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회오리 바람처럼 몰아쳤던 사정을 통해 이 사회 고위층이 부정의 연결 고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노라 하는 재벌들이 관급 공사를 따내기 위해, 혹은 인사치레로 수억 원씩 뇌물을 바치는 일이 터져도 검찰은 그것이 떡값에 불과하다고 불기소 처리할 정도였다.
돈 때문에 자기 친부모를 불에 태워 죽이는 패륜으로부터 인신매매, 쳬수 무단 방류, 대학입시 부정에 이르는 전반적인 부정의 악순환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이 사회 공동체 모두에게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있다고 본다면 일종의 편견과 사시일까?
이번 지존파 사건 이후로 식자들은 이들의 행위에 대해 사회학적인, 경제학적인, 심리학적인 진단과 분석과 처방전을 외쳐댔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거나, 효 사상을 체제 이념으로 확장시키자거나, 현행 제도를 더욱 강력하게 실시하자는 등 여러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들 속에 일치되는 부분은 결국 인간 교육이다. 언제는 인간 교육을 주창하지 않은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새삼스럽게 너도 나도 인간 교육을 외쳐대지만 여전히 우리의 비인간적 교육 제도와 사회 질서는 요지부동이다.
순전히 경제적인 우열에 따라 인간의 가치와 운명이 뒤바뀌는 질서 속에서는, 아무리 인간이 중심이 된 교육을 시킨다고 열을 올려 보았자 약간 형식적인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삶의 내용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교육은 충효 사상이나 바른 예의 범절을 가르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교육이란 근본적으로 인간 본질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동서양 사상가를 연대기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의 사상을 통해서라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바른 이해를 획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소한 실존적이고 우주론적인 인간론에 기초하여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이 시장판처럼 시끄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에서 철학과목의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다. 프랑스에도 우리의 대학수학능력 시험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가 여러 날에 걸쳐 실시되는데 첫 번 과목은 데카르트의 후예답게 철학과목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자연과학과 경제와 성장만을 인간 삶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머리 똑똑한 녀석들이 모두 자연과학이나 경제, 혹은 법학 쪽으로 몰려가서 의사나 과학자나 판사, 변호사, 즉 돈벌이가 되는 일만 하도록 사회가 강요한 상태에서 어떻게 인간 교육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이제는 뛰어난 젊은이들이 신학자나 철학자나 인류 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밥>을 맛있게 먹기도 해야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아니 더욱 중요한 일은 인간답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바르게 계획되고 실행되기만 한다면 복음은 가장 바른 인간 교육의 방법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 속에서 인간 거부를 거부하게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 이해는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무리 지고하고 절대적인 이념이나 체재라도 그런 것들로 인간을 상대화하지는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을 아마 아버지로 가르치시므로써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비인간적 질서를 허물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향한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셨다.
예수님의 눈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본질은 기계문명에 찌들고 왜곡된 인간 이해의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준다. 오늘의 우리 사회 전통과 가르침들이 겉으로는 인간 교육을 말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자본과 체제에 종속하게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 교육의 자리는 인간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는 데에 놓여 있으므로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인간론적 구원에 착상되어 있기만 한다면, 이 세상을 향해 가장 확실한 인간됨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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