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쯤 전에 성결교회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가 대구에서 있었다. 그 날 강사로 오신 분은 서울의 대표적인 성결교회 목사님이셨는데 한 시간여 동안 비교적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그 분의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목사는 재주나 돈이 많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가 어려워질 때 재주 있는 목사나 돈이 많은 목사는 목회 일을 그만둘 확률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사는 이런 저런 취미 활동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오직 목회 일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마 그 말씀은 스스로 그렇게 살아 오셨고, 또한 그런 방법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이끌어 온 경험의 고백인 것 같았다.
세상적인 일에 대해서는 가능한 대로 무관하게 지내며 하난미을 향한 기도와 신자들을 위한 말씀 준비에만 몰두하며 살아가는 가장 전형적인 성직자의 모습이다. 성직자는 일반인과 무엇인가 다른 형식과 내용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직자의 모습이다.
교회사적으로 훌륭했던 모든 성직자들은 기도나 명상이나 성경 일기와 같은 종교적 경건 훈련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예수님이나 바울 같은 이들은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프란시스코나 루터, 칼빈, 그리고 이성봉과 한경직 등 많은 목사와 신학자들이 확실한 문헌 조사를 해보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어떤 특별한 취미 생활을 즐겼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모짜르트 음악을 대단히 즐겼다고 하는데 그것을 특별히 취미 생활이라고 부를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여하튼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교회는 신자들에게 가능한 대로 세상의 일에는 마음을 두지 말도록 가르쳤다. 주일에는 물건도 사지 못하고 극장에 갈 수도 없었다.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연극하는 것도 금지시킬 정도였으니 성직자 자신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요사이는 다양한 취미 생활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는 성직자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목사는 등산을 즐기고, 어떤 목사는 낚시를 즐기거나 탁구나 테니스를 열심히 하기도 하며, 좀 잘 나가는 목사의 승용차 트렁크 안에는 볼링 세트가 들어 있으며, 휴일에 스키를 타러 다니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옛날에야 목사들이 취미 생활을 한다면 "목사가 기도나 할 일이지 저렇게 놀러 다녀도 되는거야? 라고 흠잡혔지만 이제는 일반 신자들도 성직자들의 그런 생활을 이해하는 편이다.
지방회 차원에서 목회자들을 위한 운동시합을 개최할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만큼 교회가 개화되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세속화 된 탓인지 모르지만 어느 교회이건 목사의 취미 생활이 도를 넘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성직자들은 아직도 취미 생활에 적극적이지 못한 실정이다. 모든 성직자들이 그런 취미 생활의 필요성을, 여기서는 주로 스포츠를 가리키는데, 인정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테니스만 하더라도 그 운동이 정신과 육체건강을 위해서 대단히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만 게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숙련된 성직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취미 활동이야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지만, 만약 부정적인 이유로 취미 활동을 금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두 가지 관점만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많은 성직자들은 스스로의 권위 의식 때문에 세상 문화로부터 격리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테니스를 배우려면 사설 코트에 나가서 지도를 받아야 하고 조금 익숙해지면 테니스 동우회에 가입해서 함께 쳐야 하는데, 성직자들이 세상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접촉을 기피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교는 세상과 다르다는 생각, 성직자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생각,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차별, 이런 것이 이원론적 사고방식인데, 모두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개의 성직자들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탈속, 탈역사, 반문화를 신앙의 성숙으로 생각하므로써 고립과 소외의 길을 자초하고 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이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가장 귀한 영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말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진정한 십자가란 세상으로부터의 일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세상과 인간의 문화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둘째, 위에서 언급한 신앙적 이유만이 아니라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목사들은 자의든 타의든 지나치게 많은 업무에 시달리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취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반인들도 먹고 사는 일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야 등산도 가고 스포츠도 즐기게 되는 것과 같다.
목사들은 24시간 교회와 관련되어 살아간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교회를 벗어나 집에 나와 있다고 하여도 신자들과 관련된 일이 터지기만 하면 그 짐을 함꼐 져야 하기 떄문이다. 또한 목사 스스로 교회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들므로써 한가롭게 보이는 취미 생활에 젖어들 수 없다.
특히 도시의 중대형 교회 목사들은 너무 많은 일거리에 쫓기기도 하고 신자들의 무리한 요구를 따르다 보니 영적으로 지도해야할 자신이 영적으로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목사들은 위에서 피력한 두 가지 컴플렉스, 즉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요청과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일단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인간됨의 건강성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럴 때만 참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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