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인간은 이 세계과 우주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태양계의 구석구석에 있는 비밀이 멀지 않아 밝혀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걸 만큼 인간이 자연과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
여자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출생하여 70년 안팎의 세월을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무한한 우주 가운데서 인간 개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도대체 우리가 어떤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질문을 제기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인간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양철학은 데카르트 이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아를 확실성의 근거로 삼아왔다. 아무리 이 세계와 우주의 존재가 불확실하더라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는 자기 의식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 세계를 규정하여 왔다.
그러한 사고는 서양 사람들만이 아니라, 서양의 정신과 물질문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준거는 극단적으로 자기 의식, 자기 중심적 사고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자기 영역을 확대시켜 가는 것에 묶여 있다. 돈을 번다거나 사회활동을 한다거나 자녀들을 키운다거나, 이런 모든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는 자기 중심적 사고가 팽배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좀더 솔직하게 통찰할 수 있다면 자기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개인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극단적 이기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자본의 힘이 인간의 복지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확실한 통제 수단이 그것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적절하게 제어되지 못한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간성과 그 사회 질서를 매우 악하게 파괴시키고 만다. 서구 유럽은 다행히 자본의 힘과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조화시켰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극단적 이기주의를 다스려 나갈 수 있는 전통이나 질서를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우리는 근자에 엄청난 사회 부조리를 목격하고 있다. 14년뿐이 되지 않은 한강 다리의 붕괴, 충주호 유람선의 화재 사건, 군대의 하극상이나 총기 사건을 비롯하여 세무 공무원의 세금 착복, 혹은 어린이 유괴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아무리 선진화된 사회라 하더라도 패륜적이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사회의 방향성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 국면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부정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윤택한 생활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서슴치 않게 되는 그런 사회적 풍조를 어떻게 건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식만은 반드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한 달에 수백만 원씩이나 과외비로 지출한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부산이나 대구에서 서울로 매주일 개인 레슨을 받으러 다니는 이들도 있는데 도대체 그 열성과 그 돈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일까?
예술가적 재주를 가진 아이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그 희생정신을 탓할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 돈을 자기 뜻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다만 자기 영역의 확장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고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인주의로부터의 초월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차원이며, 또한 이 문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역시 필요하다. 인간이 개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인간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물론 인간 개체가 온 우주의 의미를 담을 수도 있지만 전체로서의 인간이 없이는 그것도 가능하지 않다. 인간이란 더불어 존재할 때만 인간일 수 있는 것처럼, '너' 에게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인간이 되어간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을 지향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한 이념이 사회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전체의 공의를 강조하기 떄문에 간혹 개인의 존엄성이 손상당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가 현대 세계사에서 실패한 이유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한 데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체제가 인간을 지배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사회주의가 민주적인 방법으로 전체로서의 인간을 보다 철저하게 현실화하려고 노력했다면 구소련에서처럼 허망하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주의 이후에 우리가 채택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은 부분과 전체의 상호 균형을 이룬 세계라 할 수 있다. 부분이 서양적 사고라 한다면 전체는 동양적 사고인데, 전체로서의 인간 이해는 보충적으로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 본질 그 자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인간은 개체와 전체로서 인간이지, 개체로서만의 인간도 아니고 전체로서만의 인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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