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문학 작품들이 여럿 나왔다. 앞으로 언젠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될지도 모를 박경리 여사의 대하소설 <토지>의 완간은 그야말로 우리 모두의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25년 동안 이 작품을 집필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김진명은 한국인의 애국심을 교묘히 이용한 가상 역사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2,3>을 써서 두둑한 인세 수입을 올린 것 같은데, 작가 자신도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국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게 탈이다.
<생의 이면>으로 제 1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이승우의(그는 신학을 전공한 작가로서 존재 문제와의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 정신적 스승이라 할 이청준의 <흰옷>이나, 줄기차게 반개혁적 현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문열의 <아우와의 만남>은 서로 다른 구도 가운데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역사적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무명의 최영미를 1994년도 한국 독서계에 일약 신데렐라로 등장케 해준 작품은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다. 80년 대는 청소년들의 감상주의를 자극할 정도의 시집들이, 예컨대 서정윤이나 도종환 그리고 이해인 수녀의 여러 시집들이 수십만 권씩이나 팔려 나갔지만, 시집이 그렇게 만힝 팔리는 일은 우리 나라만의 특이한 경우라고 했다. 90년 대 들어와서는 더 이상 그런 류의 시가 독자들을 불러모을 수 없다는 일반적 시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위의 작품들 중에 가장 많이 팔렸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습을 가장 왜곡된 방향에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다. 지면 관계상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중심으로 이 시대 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이 시집을 출판한 이후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 혹은 여러 문학모임 등에서 최영미는 일약 명사로 활동하면서 그의 문학관을 전도하였는데, 무슨 내용이길래 한국 문학계에 최영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을까? 우선 이 시집의 제목으로 선택된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전문을 읽어보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시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다. 70,80년 대에 불같이 일어났던 민주화, 통일, 노동운동이 이제는 파장이라는 것이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제 갈 길로 자기 살 길을 찾아가 버렸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잔치 뒤끝처럼 쓸쓸한 것도 없다.
최영미는 80년 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서 국내적으로는 20여 년 동안의 군사통치와 반독재 운동, 인권운동, 그리고 국외적으로 90년 전후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서독의 동독 흡수 통일,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경험하였다.
그려는 그 시집에서 이념보다 돈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정보사회 가운데서 많은 방황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이 시 속에서 두 번씩이나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정의와 평화와 노동과 인권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간의 삶과 역사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로부터 나온 언어적 형상화라기보다는 일상적 삶을 재치있게 스케치한 것에 불과한 이 시가 회오리 바람 같은 인기를 끈 이유는 우선 일기가 아주 쉽다는 것과, 나름대로의 에로티시즘을, 그것도 매우 정태적이고 냉소적으로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역사적 책임감으로부터의 도피를 합리화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그러진 모습이 현대인의 자호상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총아인 컴퓨터 문명에서 볼 수 있듯이 탈역사적 정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컴퓨터는 오래 전에 마틴 부버가 분석한 대로 인간이 사물화되어가는 견인차가 될 터인데, 이러한 시대 정신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철저하게 역사와 상관 없이 개인의 편리한 삶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오늘의 잔치 끝난 시대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무얼 어찌 해야 하는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경우에 그리스도 교회는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전하시는 일에 3년 동안 진력하셨다. 그 분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일종의 축제요, 잔치이다.
그 잔치는 단순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변화와 개혁, 나아가 혁명을 뜻한다. 열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태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와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 할 바가 아닌 게 아니라, 바르게 운영되도록 하기 위하여 상관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교회의 존재 양식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교회는 하나님이 운동하시어 이 세상을 혁명하신다는 신앙 가운데 놓여 있다.
한국 교회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정했다. 희년의 성경적 전통은 바로 예수님이 지향했던 이 세상의 메시아적 변혁과 다름없다. 종으로 팔려왔던 이들이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고, 팔렸던 땅도 제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성경적 희년 전통을 축자적으로 실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정신에 따라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로 우리 사회에 들이닥친 역사적 허무주의를 극복하는데 앞장 서야 한다. 끝나 버린 잔치를 다시 벌이는 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냉소주의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면 "잔치가 끝나 버렸다" 는 사람들의 자위 앞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오히려 멋진 잔치판을 신명나게 벌여나가야 한다.
그것은 곧 에른스 블로흐의 말대로 종말론적 희망이며, 또한 사중 복음의 하나인 재림신앙이다.

* <녹색평론> 19호에 실린 김용락의 "생명의 교감과 시적 진정성", <창작과 비평> 94년 겨울호에 실린 방민호의 "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논리"를 참고했음.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