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다음과 같은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해본다. 과연 인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마음대로 시간의 틀을 넘나들 떄가 올수 있을까? 그 기계를 조작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삼국시대나 로마시대로, 혹은 예수님 시대로 돌아갈 수 있게 될 텐데, 그런 세계가 가능할까? 이미 지나간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런 세계를 3차원이니 4차원이니 하면 나름대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하고 손목시계의 시계 바늘에 따라 움직이며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상 만화의 소재쯤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과거의 시간으로 역진하는 일은 불가능 할지 몰라도 미래의 시간으로 여행하는 일은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의료계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다고 하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을 특수 냉동 처리를 한 다음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을 만큼 의학이 발전했을 때 다시 소생시켜 치료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육체가 50년 동안, 혹은 100년 동안 냉동상태로 전혀 세포의 손상 없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그런 일이 꿈으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혹성 탈출> 도 이런 각도에서 구성된 작품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인간이 빛의 속도로 여행할 수만 있다면 지구상에서의 시간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순전히 가상이지만 일단의 우주 항공사들이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까울 정도의 우주선을 타고 일 년 동안 여행을 하다가 어느 혹성에 불시착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혹성은 몇 천 년이 지나 버린 지구였다. 그 동안 지구를 지배하던 인류는 망하고 원숭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모두 시간의 신비를 전제하고 있다.
인간은 시간과의 투쟁 속에서 존재한다. 시간을 떠나면 존재도 없다. 형이상학이나 물리학은 근본적인 면에서 보면 모두가 시간에 대한 인식과 확인 작업이다.
현대 철학의 장자격인 마틴 하이덱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명저를 써서 일약 세계적 철학자 반열에 서게 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참된 존재는 물리적 시간(Zeit)이 아니라 시간성(Zeitlichkeit)과 연관된다는 것이 그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뉴턴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이며 현재 생존하는 인물 중에서 우주의 근원에 가장 근접해 있는 학자로 불리우는 스티븐 호킹이 밝히려는 것도 사실은 물리의 세계와 시간의 관계다. 그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물리학을 소개하기 위해 <시간의 역사>라는 책을 썼는데 놀랍게도 수백만 부다 팔렸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책이 밝혀보려는 바도 역시 우주는 바로 시간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별, 공룡, 꿀벌, 제비, 참나무, 더 나아가 인간과 지구도 역시 시간의 역사에 의존해 있다. 결국 존재의 비밀은 시간의 비밀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렇데 다른 동물들은 시간에 순응해서 살아가는데 반하여 인간은 그것을 거역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동물들은 자연이 준 시간만큼 살다가 죽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인간만은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도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우선은 지상의 시간을 늘려보자는 생각이다. 먹고 입고 사는 시간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바로 인간의 역사인지 모른다. 대표적인 예는 이집트의 피라밋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라오들은 신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야 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피라밋을 쌓고 미이라를 만들어서라도 파라오가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동양에서는 만리장성을 축성한 것으로 유명한 고대 중국의 진시황도 역시 그런 류에 속한다. 그는 기원전 247년에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여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기원전 221) 기원전 210년에 죽었는데, 술사들에게 불로 장생할 수 있는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1975년에 발굴된 진시황의 능은 실제 궁궐을 지하로 옮겨 놓은 것처럼 광대했다. 세계를 지배하고 영원을 꿈꿨지만시간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하였던 진시황처럼 인간은 도저히 시간을 확장할 수도, 시간으로부터 자유할 수도 없다.
또 다른 하나의 시도는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가므로써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술가나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 그에 해당한다. 예술가들의 예술활동 앞에서는 시간이 정지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육신이 허물어지는 순간까지 진혼곡 작곡에 몰두했던 모짜르트는 시간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살아보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이들을 시간의 승리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시간은 신비다. 아무리 물리학적 공식에 따라 밝혀보려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형이상학적 통찰력을 동원하여 엄밀하게 분성해 본다고 하더라도 시간만큼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듯이 우리가 지금 태양력으로 일년을 365일로 계산하고 기원전과 후를 나누어 연대수를 계산하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이런 시간 측정이란 게 별반 의미 없는 일이다.
또 한 해가 시작되었다. 일 년이란 시간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 루 같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한 해를 시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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