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한 여름, 동네 느티나무 아래서 노인들이 둘러 앉아 두런두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장기를 두고 있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장기는 둘이서 심각하게 두는 것보다는 옆에서 훈수를 두는 이들이 빙 둘러 모여 섰을 때 한결 흥이 나는 법이다.

때에 따라서는 훈수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것이 장기 두는 맛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창 승부가 기로에 서 있는데 어깨 너머의 훈수 한 수로 내기 장기에 지게 되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화를 낼 것이고, 그러다가 멱살잡이 싸움판으로 뒤바뀌기도 한다.

이상한 것은 직접 장기를 둘 때보다 훈수를 둘 때, 수가 더 잘 보인다는 점이다. 10이라는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직접 두게 되면 8이라는 실력이 나타나지만, 훈수를 둘라치면 12의 실력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프로급이면 별로 큰 상관이 없겠지만 아마추어들에게는 이러한 논리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장기만이 아니라 바둑의 경우도 마차가지이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게임에 임하는 사람들의 수가 답답하게 보이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직접 장기를 두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내기 장기일 경우에 더 그렇지만,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좋은 수가 잘 발견되지 않는 반면에, 훈수를 두는 사람에게는 객관적인 판단력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잘 보인다.

장기판 혹은 바둑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바로 승부에 직결된다. 따라서 훈수를 두는 사람은 그것을 밖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훨씬 좋은 수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생을 흡사 한 판의 장기나 바둑과 비교 할 수 있다. 아주 유사한 점이 많다. 같은 한 판의 게임임에도 그것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서로 다른 판단과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다.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장기나 바둑의 수가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밖에서 바라보기 연습이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밖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전자의 입장이며 훈수자의 입장이다. 밖에서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은 순간적인 이익과 손해에 대해 가능한 둔감하게 느끼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이해 타산이 직결된 문제들이 우리 인생의 길목마다 놓여 있으니까 말이다.

지난 11월 16일에 대학수학능력 2차 시험이 있었다. 1차 시험에 비해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수험생들의 점수가 10점 이상 떨어질 것이라고 야단들인가 보다. 어려우면 모든 학생들에게 어려운 것이고 쉬우면 그것 또한 마찬가지인데 2차 시험의 난이도 때문에, 이번 2차 출제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느니 하면서 많은 학부모들이 흥분하고 있다. 학생들 자신보다도 그 부모들의 지나친 집착이 문제를 점점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떤 입시제도이건 완벽할 수는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유별나게 국민들이 이것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대학입시를 인생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일반 국민의 정서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번 시험이 있던 전날 팔공산 갓바위 앞에는 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손이 닳도록 빌고 갔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몰입되는 열성이 이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자기 가족 중에 수험생이 없는 경우는, 이번 수학능력 고사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시험을 한 번에 끝내든지, 지금처럼 두 번에 걸쳐 시행하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공공의 정의와 선에 따라 교육정책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가족 중에 응시자가 없는 이들이 응시자가 있는 이들보다 객관적일 수 있는 이유는 이 일에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수학능력 고사를 밖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 무엇인가에 치우치거나 집착해 있다는 말이다. 어릴 때의 가정 교육, 학교와 사회의 경험, 현재의 상태에 따라서 우리의 판단은 한쪽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신앙적으로 해결하는 이들이다.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비교적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객관성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인생의 구체적인 사건의 가치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항상 그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들과 신약성경 기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쳐 주고 있는 참된 신앙이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신앙 자체가 잘못되어 인간을 더욱 왜곡시키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 놓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려는 신자라면 자기 자신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성과 평상심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모두가 엑스트라에 불과한데도 서로가 주인공처럼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실수를 곧잘 저지른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책임성 있게, 그리고 성실하게 이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완전히 빠져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오히려 끊임없이 그것에서 일탈하여 밖에서 바라보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그럴 경우에만 그가 진정으로 주인공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를 향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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