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성탄절에, 교회의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에스더회에서 지역의 어려운 가정을 찾아 도운 일이 있었다. 그 때 교회 차원에서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나도 그들과 동행해 몇 가정을 방문하였다.

그 때 방문했던 가정 중에 어느 노인이 혼자 살고 있는 그 산동네를 이번 설 연휴가 시작하는 9일 낮에 다시 한 번 찾아갔다. 꼬불꼬불 언덕의 작은 골목길을 돌아 가장 꼭대기 허름한 그 집에 들어섰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나지막한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게 누구요?”라는 생기 없는 목소리가 들려 나왔다. 살기 힘들 정도로 너무 낡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집은 주인이 살고 있지 않고 나그네 두 가정만 살고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방은 대문에 들어서면 건너다보이는 방이고, 주인의 조카인지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방은 안쪽인데, 둘 다 땅 속에 파묻힐 듯이 푹 꺼져 있었다.

겨울이라서 그랬는지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비닐로 겹겹이 봉해져 있었고, 부엌을 거쳐서 몸을 꾸부리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 이부자리는 방바닥에 깔려 있었고 한쪽에는 아침 식사를 하고 치워 둔 밥상이 상보로 덮힌 채 놓여 있었다. 작은 주전자, 오래된 카세트 라디오, 요강, 약봉지 등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고, 전기담요가 요 위에 깔려 있었다.

그 분은 일주일째 감기를 앓고 계셨다. 말씀을 하시는 중에도 기침을 할 때마다 옆구리에 대단한 통증을 호소하였고, 윗목에 있는 요강에 가래를 뱉으셨다. 병원에는 가 보셨느냐는 질문에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약 한 봉지를 입에 털어 넣으셨다. 어떻게 사시느냐고 질문하자 현풍 면에서 나오는 배급 쌀과 한 달에 4만 원, 혹은 5만 원씩 받는 돈으로 살아간다고 하신다. 그 돈으로 반찬도 사야하고, 비누도 사야하고, 연탄도 사야하고, 전화세도 내야 한다.

이렇게 외롭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양로원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에, 현풍면 직원들도 그렇게 말을 하지만 양로원에 가서 답답하게 어떻게 사느냐, 이렇게 혼자서 자유롭게 사는 게 그래도 낫다고 하신다. 젊었을 때는 꽤나 깐깐한 성격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병원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의료보험 카드를 굳이 꺼내신다. 은행카드처럼 생겼는데, 경북대학교 부속병원과 계명대학교 부속병원 카드였다. 카드를 보고 그 분의 함자가 배자 호자 환자라는 것을, 그리고 연세가 5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님보다 한 세가 적으신 75세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 친척이 없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지난 일들을 스스럼없이 털어 놓으셨다.

배 할아버지는 다섯 형제 중에 맏이로 태어나서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일본에서 자기보다 한 살 적은 일본 여자와 결혼했는데, 결혼하자마자 해방을 맞아 일본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해서 막노동을 하며 30년쯤 살고 있던 일본 부인이 한국에서의 생활이 너무힘드니까 일본에 들어가서 살자고 했다는 것이다. 배 할아버지도 그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비자 신청을 했는데, 부인 것만 나왔다.

부산에 있는 일본영사관에서 하는 말이, 일단 여자만 일본에 들어갔다가 여자의 가족을이 도장을 찍어주기만 하면 남편도 즉시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배 할아버지는 부인을 먼저 일본에 들어가게 했는데, 그녀의 가족들이 남편 초청을 위한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아 결국 나뉘어져 살게 되었다.
아마 능력도 없고 이미 늙어 버린 한국 남자를 데리고 와 봐야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는 가족들의 설득에 남편을 불러 오려는 부인의 결단도 허물어지고만 것 같았다.

6,7년 전까지는 그래도 편지 내왕이라도 있었지만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도 모르는 채 이제껏 살아왔다고 한다. 옛날 부인을 생각하며 배 할아버지는 일본 여자들이 한국 여자들에 비해 훨씬 남편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한국 여자와 재혼하지 않은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왜 일본 부인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제는 옛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뿐이다.

배 할아버지는 동생이 네 명이나 되고, 조카들도 여럿 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은 일찍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동생들과 살고 계셨는데,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만 하더라도 가끔 가 보곤 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자기를 피붙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굶어 죽으면 죽었지 동생들에게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

“나에게 재산이라도 있으면 찾아오겠지만, 글쎄요.” 라고 말씀하시는 배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삶의 좌절과 회한이 그늘져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가 보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방에서 나와 부엌을 잠깐 둘러보았다. 전기밥솥, 물통, 동네 부녀회에서 담가준 김장, 석유곤로, 비교적 깨끗하게 닦여진 냄비 등, 몇 가지 부엌세간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대낮인데 그 부엌은 어두컴컴하였다.

배 할아버지는 나름대로 삶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젊은시절의 이국 생활, 이국 여인과의 사랑, 그 열망과 배신감과 무력감, 국제 정세 속에서 개인이 겪게 되는 숙명적인 사건들이 그 분의 가슴 깊이 쌓여져 있었다. 이런 것들은 흡사 게오르그의 소설 <25시>의 주제와도 같았다.

그는 지금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만도 못하다는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몇 달 전에 마악진 연탄 보일러, 거의 집세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주인에게 고쳐 달라는 말도 할 수 없는, 아직도 혹독한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 때에 전기담요 한 장의 온기에 의지하여 한 평 반짜리 방에서, 그는 겨우 생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띄엄띄엄 찾아와 10만 원이 든 봉투 하나를 내밀고 돌아간다고 해서 그 분의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이제 우리 교회는 배 할아버지의 보다 나은 생활조건, 아니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기도해야 하겠다.     <정용섭,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