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기독교 역사 중에서, 어느 한 때라도 교회가 완전히 일치된 적은 없었다. 현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를 보면 사도들이 직접 다스리던 아주 초기 공동체마저도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분리의 아픔을 겪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그 분열을 즐기거나 인격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분열의 역사가 교회 안에 항존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 문제를 원죄론에서부터 풀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완전한 교회 일치는 과거나 현재, 아니 미래에도 가능하지 않다고 모아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비교적 일치의 정신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내용에 있어서까지 일치된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성경관, 서로 다른 세계관과 다른 윤리적 판단이 그들 안에 내재해 있었다.

단적인 예로, 로마에 있는 교황청과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해방신학 공동체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보아도 그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우리 개신교는, 특별히 한국의 개신교회는 분열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있으며, 설령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분열의 상처를 극복
해 보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분열이라는 상처를 그 밑거름으로 성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쪼개지고 나뉘어지는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인간적 열심과 투기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분열의 부끄러움이나 여러 치졸한 무리수들을 숨겨 왔고, 오히려 그 과정을 문제 삼는일은 부정적 사고라거나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매도하였다.

이제 한국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성장의 속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상 지난 20여 년 동안 과속이라 할 만큼 한국 교회는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을 향해 달려 왔는데, 이제는 교회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성장의 속도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체, 내지 후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분명히 위기라면 위기라 할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과연 무엇일까?

그 동안 한국 교회가 채택한 일반적 방법은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교회를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부흥회로 통칭되는 설교와 모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를 바탕에 깔지 않은, 거의 개인적인 흥미를 그 동기로 삼고 있다.

비교적 세련된 교회의 프로그램은 소위 큐티와 같은 것으로, 약간 지성적인 사람들의 종교적 경건성과 합리성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 이외에 교회의 보다 보편적인 일들 중의 하나는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교회 조직이 가능한 대로 완벽한 메카니즘을 요청하고 있으며, 신자들은 그 구조 속에서 교회 출석의 동기를 발견하고 있다. 세상의 기업처럼 교인들이 조직을 기초로 연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전체 실존으로 다가서는 게 아니라 부분적인, 그것도 주변적인 삶으로 서게 만든다. 신앙이 삶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있으면 좋은 것이 되어 버렸다. 한국 교회의 윤리성 부재는 교회 강단에서 윤리적 설교가 외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신자들이 신앙을 실존으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교회의 내적인 문제들이 교회 성장을 둔하게 만들기 했지만 이유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적인 이유를 찾아 보면, 한국 사회가 이제 안정기에 들어갔다는 점과 타종교의 분발을 들 수 있다.

여하튼 내외적 요인들로 인해 한국 교회는 그 한계점에 와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우선 내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갱신해 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중에 가장 우선되는 작업은 교회의 일치성을 본질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처음에 지적한 대로 현실 교회가 완벽하게 일치할 수야 없지만, 최소한 신학적인 작업에서, 그리고 신앙고백적인 점에서 확고한 방향 설정은 해야 한다.

지금 당장 성결교니,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교단을 한데 묶어 하나의 교회로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구태여 무리하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며, 그렇게 되더라 치더라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교단 안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분열과 배타성이 자리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지금부터, 그리고 항구적으로 지속해야 할 작업은 교회의 단일성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의식화 작업이다.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교회 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지만, 그것의 분명한 의미와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교회의 단일성은 비록 신학적 입장의 차이가 있더라도 상대방을 하나님 안에서 형제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형제로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한국 교회가 더 이상 단일성에 대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안타깝지만 멀지 않아 전체 교회가 함께 몰락하게 될지 모른다.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