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유럽과 북미의 대학에는 안식년 제도가 정착되어 있다. 교수들은 6년 동안 가르치다가 7년째는 1년 간 강의를 맡지 않고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연구활동을 한다. 많은 교수들은 이 안식년에 시간에 쫓겨 미루어 놓았던 책을 본다거나 혹은 외국에 나가 최근의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책을 저술하기도 한다.
그 일년동안의 시간은 그저 편하게 노는 시간이 아니라 소진된 힘을 비축하는 기간이 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교수들은 평소에도 개인적인 시간이 많은데 쓸데없이 안식년을 줄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아 안식년 제도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다. 그러한 전통에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제도를 실시하는 대학들이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 안식년 제도는 사실 목사에게도 해당된다. 목사들이 6년 간 봉사를 하다가 7년째는 일년 동안 교회 일을 멈춘다. 목사들의 안식년도 교수들의 경우와 같다. 일 년 동안 쉬는 것이 그 다음 6년 동안 일하는데 더욱 역동적으로 창조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안식년 제도는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예컨대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희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군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 (레 25:1~7)
안식년은 더 근본적으로 안식일 제도 안에 그 뿌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안식일은 안식년과 희년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가장 특징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일종의 종교적으로 사회적인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볼 때 두 가지 전승을 갖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과 관련 있다(출 20:1~17). 하나님이 육일 동안 세계를 창조하시고 칠일 째에 쉬셨기 때문에 인간들도 칠일 째에 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출애굽과 관련된 것으로서(신 5:6~21) 애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므로 그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전승은 일견 다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과 그의 구원 사건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창조와 출애굽은 하나님의 핵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아는 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에 대한 언어적 오해가 없어야 하겠다. '지킨다'고 하는 말이 지나치게 법규적 의미로 해석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일종의 의무로 생각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안식일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과 환희를 수반한 자발적인 참여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건 앞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일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 분의 창조와 구원 앞에서 인간의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무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만 그 분만을 찬양 할 뿐이다. 이러한 안식은 진정한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늘의 인간은 쉴 줄을 모른다. 쉰다는 것은 뒤로 처지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쉬는 것을 두려워한다. 일벌레처럼 매일 무언가 생산해 내야만 안심한다.
최근에 한국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하기 싫어하고 편히 사는 것만 바란다고 언짢아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추하고(dirty) 위험하고(dangerous) 어려운(difficult) 일. 소위 3D는 멀리한다고 야단이다. 노동자들이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독려하고 채근한다.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타당할까?
실제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선진국의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또한 우리와 비슷한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투자하고 있다. 물론 70,80년 때보다는 적게 일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90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노동자들에게 그 당시의 잔인한 노동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우리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쉼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쉬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여름철만 되면 바캉스를 다녀오지만 그것이 과연 참된 쉼일까? 오히려 더욱 비참한 노동인지도 모른다. 노는 일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그것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파괴시킬 뿐이다.
교회에서의 안식일도 역시 이런 방향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목사와 신자들이 안식일 하루 온종일 교회 일에 시달려 피곤해한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저 일 주일에 한 번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간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자위한다면 안식일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는 일이다.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의 일을 접어둘 수밖에 없을 만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의 일을 접어둘 수밖에 없을 만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사역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환희 가운데서 그것을 찬양할 수 있을 때, 주일은 진정한 안식일이 될 것이다. (1993년,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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