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은 10월 31일로 마침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 조항에 이르는 공개 건의문을 게시한 바로 그 날이었다. 교회사에서는 476년 전의 그 날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하고 있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이 그 날을 기해 개혁운동을 벌이자고 작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심코 그러나 확고한 신념 가운데서행한 일종의 대자보 사건이었을 뿐이다.
이미 루터 이전에도 여러 형태의 종교개혁의 조짐이 있었으며,그 후에도 여러 갈래의 개혁운동이 전개되었지만, 1517년의 그날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과 가르침에 대해 더 이상 동의할수 없는, 전혀 새로운 개신교 신앙의 출현이 상징적으로 발생한날이기 때문에 교회사가들은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간주한다
'잘 알려진 대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 가지 핵심적 강령을 갖고 있다. 첫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둘째는 "오직 은총"(solagTatia), 셋째는 "오직 믿음"(solafide)이다.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규정하튼권위로서 성경과 교회를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 교회는 결국황으로 대표되는 조직이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성경의르침과 교황의 가르침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교회의 권위도 역시 성경에 종속한다고 주장 하므로써 교회의 권위를 상대화시켰다. 은총과 믿음의 강조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지키거나 어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자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만이 모든 교회와 신앙의 절대적인 권위이며, 의로움이나 죄의 용서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고, 그 조건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새롭게 가르친 내용이다.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이 담고 있는 내용의 핵심은 칭의론이다. 인간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셈이다 루터는 젊어서부터 인간의 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의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로만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전존재에 얽힌 문제이다.
의는 인간의 자유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론을 밝혀 주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데 죄성으로 인해 그 자유를 획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유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곧 죄로부터의 해방이며, 이는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어떻게 의를 획득할 수 있는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아마 의를 획득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이아니다 인간이 부클 모으려는 노력이나 지식을 쌓으려는 노력,혹은 윤리적 실천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자기 자신안에 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것을 성취하므로써 때에 따라 자유와 의를 체험하기도 한다.
종교의 가르침도 이러한 의를 얻기 위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여러 종류의 종교적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11월 4일에 세상을 뜬 한국 불교의 대스승이라 할 성철 승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한 극단적 고행과 수행으로 법력이 대단한 분이라고려져 있다.
예컨대 그는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지내는 수행인 장좌불와를 8년 동안이나 행했으며, 찾아오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자기가 거하는 암자의 둘레에 철조망을 치고 묵언수행으로 20년 간이나 살았다고 전한다.
현재 카톨릭 교회의 갈멜 수녀원이라 하는 곳은 수녀들 중에 평생 동안 세상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오직 그 곳에서 은둔한 채 수행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물론 개신교회 안에서 그런 류의 수행이 없진 않다. 간혹 40일 금식기도를 하거나 철야기도를 하므로써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종교적 고행과 수행을 몇 마디로 평하고 싶지는 않다 종교 안에 이러한 초월적이고 순수한 자기 훈련이 없다면 참으로 삭막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정신을 그런것와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 정신에 의하면, 인간이 행하는 그러한 윤리, 종교적 노력과 행위는 아무리 철저하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가 인간을 의롭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론과 세계 이해에 근거한 논리이다.
루터는 그 당시 로마 카톨럭 교회가 종교적 업적을 통해 하나님의 칭의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 하였다. 인간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이다. 이를 철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 "
행위가 없는 믿음이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서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고귀한 선행과 초인간적 고행과 금욕이 인간 세계를 어느 정도 정화해 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다만 믿음을 자신의 윤리적 무책임감에 대한 변명이나, 혹은 삶의 안이한 편의주의로 생각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종교개혁 정신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다는고백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인간이 선행을 베풀고 금욕과 고행을 쌓아도 그것이 가지는 가치는 대단히 작다는 고백이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적 고백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질이 죄라는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하는 칭의론이다. 교회의 어떤 노력도 그것으로 인간을 하나님에게 이를 순 있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것이 인간됨을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 행위를 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윤리는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하냐님의 선물이라고 보아야 옳다. (1993, 11월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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