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가보안법과 안식일

우리나라의 최고 사법기관인 헌재와 대법원에 계시는 어른들이 ‘국가보안법’을 합헌이라고 주장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것을 칼집에 집어넣어 박물관으로 보낼 유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후에 시민 단체, 학계, 정치, 혹은 종교계까지 포함해서 그래도 자기주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극한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보수 단체에서 보이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 1500명(?)에 이르는 보수 원로들께서 국가보안법 철폐 절대반대 집회를 열었고, 한나라 당은 당대표가 배수의 진을 치고 국보법을 수호하겠다는 비장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보수적 종교 집단, 특기 기독교 계통의 보수(반동) 집단의 대대적인 반대 집회가 열리지 않을까 예상된다.
순진한 분들을 위해서 내가 괄호로 묶어 사용한 ‘반동’이라는 단어를 좀 설명해야겠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낮추어 부르는 ‘빨갱이들’이 ‘반동분자’라는 말을 자주 썼기 때문에 ‘반동’이라는 단어 자체도 무언가 이념적 색깔이 묻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반동(反動)은 말 그대로 변화를 반대하는 태도를 뜻한다. 부의 양극화, 가난의 대물림, 또는 교회 성장지향주의 및 담임목사의 세습 같은 현상을 변혁하기보다는 그런 변혁을 반대하는 태도 말이다. 이는 곧 ‘현상유지’(status quo)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념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반동이 아니라 격동(激動)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프로테스탄트가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이 반동은 매우 반기독교적인 태도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전통을 무조건 무너뜨리는 것이 옳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혁과 변화와 격동은 인간의 생명을 훼손시키는 이데올로기를 밀어내고 풍요롭게 살리는 힘으로 채운다는 뜻이다.
인간의 생명을 훼손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예수님 당시의 안식일을 예로 들어보면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진 모든 갈등의 중심에 이 안식일 문제가 들어있었다. 율법의 전문가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 이들의 우두머리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의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예수는 분명하게 범법자였다. 그들이 예수에게 제기한 논리는 다음과 같다. 병자를 고치는 일은 우리 모두 바라는 바다. 그러나 당장 죽을 사람이 아니라면 하루 참았다가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치료해라. 그러면 당신의 치료 행위도 인정받고 안식일 법도 유지된다. 이들의 논리는 내가 볼 때도 정당했다. 겁 많고 현실 타협적인 나 같은 인간이라고 했다면 아마 그들의 요구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굳이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환자의 병을 고쳤다. 예수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이중에 어떤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 제삼자가 양측의 주장을 판단한다면 바리새인 쪽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주장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반면에 예수의 주장은 과격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렇듯 어떤 집단이나 어떤 생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이 생각은 물론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의 뜻이지만, 밀고 나감으로써 결국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었다.  
예수는 왜 자기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정도로 극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일까? 바리새인들에게 설득당하는 게 기분 나빴기 때문도 아니고, 관용정신이 없기 때문도 아니다. 정신 분석가는 예수의 무의식을 이러쿵저러쿵 분석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예수가 오직 한 가지의 절대적인 세계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었다는 사실만이 거의 자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결단과 행동을 설명해줄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예수가 또 하나의 다른 기준을 강요하는 바리새인들과 적당하게 타협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는 생명의 절대성을 상대화하고 대신 안식일 법을 절대시하는 율법체계를 예수는 근본적으로 혁파하셨다. 그 율법체계를 실제적인 삶에서 실현하던 바리새인들의 최고 법정이 곧 산헤드린이었다.
누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체포당하신 예수는 그 당시 사법권을 행사하던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기 전에 유대의 산헤드린 의원들에 의해서 먼저 재판을 받았다. 사형 판결의 권한이 없었던 이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결국 십자가형의 선고를 얻어낸다. 유대의 전현직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의 대표 71명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유대의 최고의 종교 및 사법기관인 산헤드린은 율법을 근간으로 하는 유대 하이라키의 정점에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형 선고에 개입하게 된 단초는 바로 안식일 논쟁에 있었다.
나는 여기서 안식일에 관련된 많은 성서적, 신학적 논의를 전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안식일을 놓고 율법 전문집단인 산헤드린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논란의 핵심만 간략하게 다루겠다. 원래 창조 사건과 출애굽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 안식일이라는 법, 또는 그런 제도는 명목상 하나님의 창조사건과 출애굽 사건을 기린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의 실질적 의미는 고강도의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이었다. 노동으로부터 해방은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시작된 안식일 법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안식일은 인간을 규제하는 통제의 수단으로 악용되어버렸다. 이런 속성을 꿰뚫어보신 예수는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병자를 치료하면 예수의 뜻도 관철되고 바리새인들의 체면도 살린다는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배척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래디칼리스트다.
오늘 국가보안법에 얽힌 형편은 예수 당시의 안식일 논쟁과 쏙 빼 닮았다. 보수반동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중도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절당하게 손질해서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약간 개혁적인 사람들은 국보법을 폐지하는 대신에 미진한 부분을 형사법에 보충하거나 대체법을 만들자고 하며, 진보적인 사람들은 다른 조치 없이 무조건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은 진보적인 색깔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사구시를 지향하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그가 단서 없이 철폐를 주장했다는 것은 좀 의외이다. 본인의 소신인지, 정략적인 것인지 나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지만 일단 바른 선택이었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국보법을 안식일 법에 대입시켜보면 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대답은 어렵지 않게 주어질 것이다. 안식일을 피해서 장애인을 고치라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예수의 근본정신이 크게 훼손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가 굳인 안식일을 어기면서까지 장애인을 치료했다는 사실에서 판단한다면 국보법을 적당하게 손질해서 쓰자는 일반 대중의 의견은 설 자리가 없다. 더구나 국보법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안식일 논쟁으로부터 촉발된 갈등을 견디지 못해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부추긴 산헤드린 법정의 태도와 똑같기 때문에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문제는 ‘시기’에 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불량한 국가인 북한이 바로 코앞에 있는 마당에 국보법이 아무리 악법이라고 하더라도 폐기할 시기는 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문제는 지난 <말씀과 삶> 8월호에서 내 생각을 포괄적으로 전달했으니까 여기서는 줄이기로 하자. 다만 예수는 안식일 문제가 무의미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거나 미루지 않고 즉각적으로 대처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해두자.
어떤 사람은 국보법이 폐기되면 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그런 것을 노파심이라고 한다. 안식일과 예루살렘 성전 및 제사를 모두 포기한 기독교가 종교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국보법 없는 대한민국도 평화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혼란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혼란을 부추기는 사람들이다. 좀 과격하게 표현해서 국보법 수호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국가의 안보보다는 정권유지의 도구로 악용된 현재의 국보법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는 불안감 내지는 죄책감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또는 지난 50년 이상 그런 사람들의 선동에 의해서 세뇌된 민중들의 ‘레드 콤플렉스’의 발현일 수도 있다. 이런 갈등이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상처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9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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