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0월5일) 서해안에 있는 대천까지 하루일정으로 다녀왔다.
8년된 아반테를 몰고 동대구 톨게이트로 들어가서
대전의 유성 톨게이트로 빠져나올 때까지의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고속도로 운전은 속도감 말고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정말 재미없는 길이다.
유성으로 빠져나오고부터는 국도로 서해안까지 가야한다.
공주, 청양, 보령, 그 다음에 대천이다.
유명한 대천 해수욕장이 있는 그곳이다.
드라이브는 역시 국도였다.
특히 공주에서 청양까지 4,50km 정도의 국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길은 4차선과 2차선이 번갈아가며 연결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옛날 길 그대로의 2차선 쪽이 한결 좋았다.
하양보다 윗쪽이라서 그런지 이미 코스모스가 제철에 접어들었다.
길 양쪽으로 흡사 사열을 준비하듯 길게 늘어선 코스모스의 군락이라니.
빨강, 분홍, 흰색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코스모의 청초한 모습을
감상하면 운전하는 기분을 아는 사람을 알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색의 세계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일까?
노출이라기보다는 그들은 그 색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색은 코스모스가 우주와 교감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는 그 색의 세계야말로
그들이 우주로부터 얻은 것이다.
색이 오직 지구에서만 가능한 현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분은 알리라.
그리고 그런 사실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특히 태양과 지구가 빛을 통해서 사랑을 나눈 그 결과 중의 하나가 색이다.
공주에서 청양까지 코스모스만 만발한 게 아니다.
꽃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어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주황색 일색의 꽃무더기가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코스모스의 꽃잎과 비슷하게 생긴 꽃잎을 가진 꽃인데,
꽃잎의 숫자가 더 많은 듯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런 꽃의 자태와 색의 아름다움을 내 머리 속 깊이 꼭꼭 눌러 담아 두었다.
코스모스 너머 논에는 이미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벼가 보기 좋게 자리를 깔고 있었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일년치 먹거리,
알알이 영근 생명의 실체들,
그런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배가 불렀다.
약간 멀리는 그리 높거나 험하지 않은 산들이 병풍처럼 사람들의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다.
공중에서는 가을 햇살이 감당할 수 없는 만큼 무더기로 쏟아지는 중이었다.
그 시간, 그 공간 안에서 내가 그런 생명 현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행복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내 승용차 안에는
절규하는 듯한 조용필의 노래가 흘라나오고 있었으니
내가 무엇을 더 바라랴.
킬리만자로의 ... 등등의 노래가.
유성에서 대천까지 두 시간 가까이 가는 동안
두 장의 씨디를 들었는데,
한 장이 바로 조용필의 것이고,
다른 한 장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복을 입고 '찔레꽃' 같은 노래를 부르는 그 사람,
뒤늦게 기억이 난다)
장사익의 '하늘 가는 길'이라는 타이틀의 씨디였다.
우리 가족이 유럽 여행을 다닐 때 딸들과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노래를 들을지 싱갱이가 많았다.
그 녀석들은 조성모의 노래를 듣자고 하고,
우리는 조용필과 피티김의 노래를 듣자고 다투었다.
그럴듯한 여행을 하려면 아이들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게 좋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많은 이유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노래도 포함된다.
조용필의 노래가 왜 괜찮은지에 대해서 여기서 굳이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냥 한 마디만 한다면 조용필은 자기의 분명한 음악세계를 갖고 있다는 게 그 이유이다.
누가나 다 자기의 노래 세계를 갖고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냥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거 하고
그 노래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거 하고는 좀 구분해야 한다.
나는 조용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약간 유치한 가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어떤 영감을 느끼곤 한다.
조영남에게는 그런 게 별로 많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조영남의 가창력이나 끼는 조용필 못지 않는데 말이다.
장사익의 '하늘 가는 길'을 들어보셨는지?
그 노랫말은 바로 찬송가 가사와 같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반주로 인해서 장사익의 노래는
세속 노래의 경지 끝에 도달했다.
괜히 말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
코스모스, 벼, 산, 가을햇살, 조용필과 장사익의 노래 ...
이런 것들 속에 흠뻑 빠져 있었던 어제 그 시간들은
나에게 행복했던 순간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다른 그 무엇이 없어도 영적으로 풍요로운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면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 안에서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느낌이 배부른 소리일까?
이게 추상이고 관념뿐일까?
이런 기쁨과 자유가 생명의 가장 현실적인 내용들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초월의 경험들이 아닐까?
이런 자유와 행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신학이다.
잘 나가다가 또 신학으로 빠져버리는 군.
이만 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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