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오늘 노무현씨가 우리 나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노무현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작년 12월19일 대통령 선거 발표가 있던 날 저녁에는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티브이 앞에 앉아있었지만 오늘은 느긋한 마음이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인해서 잔치 분위기는 많이 축소된 취임식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희망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단상에는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 파월 미국무장관, 고이즈미 일본 총리 등을 비롯하여 여러 내외빈 인사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대 대통령들도 앉아 계셨습니다. 직전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그 이전의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제씨였습니다.

최규하씨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1979년 10월 살해당할 때 국무총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통령직을 인수받은 분이십니다. 그분이 소위 <서울의 봄>으로 일컬어지던 1980년에 좀더 소신있게 국무를 수행하셨더라면 우리 나라의 현대사는 훨씬 빨리 군사독재로부터 문민시대로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몇 달 동안 매우 무능력한 대통령에 불과했던 그분을 보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한 이들에 의해서 질곡의 시간으로 빠져든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다시 회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전두환씨는 오늘도 흰색 목도리를 두르고 나오셨더군요. 12.12와 5.18 사건으로 구속당하기 직전 연희동 골목에서 성명을 발표할 때도 흰목도리였습니다. 하극상의 본보기였던 12.12, 민주사회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에게 군인을 투입시켜 잔인하게 학살한 5.18은 전두환씨가 계속 짊어져야 할 부끄러운 멍애일 것입니다.

노태우씨는 멀리서 잡은 렌즈 그림이라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혈색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그를 물태우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전두환씨의 지명을 받아 운 좋게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대신 돈을 많이 챙겼습니다. 앞서의 전두환씨나 노태우씨 모두 법원에서 수 백억원의 벌금형을 받았는데 갚지 않고 있습니다. 돈을 어디에 감추어놓았는지, 아니면 자기를 따르는 정치 후배들에게 모두 풀어먹였는지 모르겠지만 배짱 좋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취임식을 보고 있던 아내가 흥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두 양반은 감옥살이를 했는데 부끄럽지도 않나? 벌금을 물지 않고도 저렇게 앞에 나서는 걸 보면 참으로 염치도 없네."

김영삼씨의 눈초리는 여전히 날카롭(차갑)습니다. 무슨 야망이 남았는지 어떤 원한이 사무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김대중씨 부부와의 인사는 너무나 냉냉합니다. 김영삼씨는 대통령 초기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개혁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국민의 지지가 거의 90% 이상이었으니까 그 당시의 국민적 호응을 알만 합니다. 실명제 실시, 군대 내의 하나회 숙청, 고급 공무원과 국회위원의 재산등록 등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자초한 잘못은 아들 관리였습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사정이 없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아들로 인해서 그의 통치력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에게는 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정권 5년간 얼마나 많은 대형사고가 터졌는지 "우째 이런 일이!"라는 유행어가 회자되곤 했습니다. 급기야 IMF가 터짐으로써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사실 아이엠에프는 김영삼씨 자신의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 경제의 토대가 너무나 허약체질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누가 대통령으로 있었든지 터지고 말 일이 터진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게 아니라, 다만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고향 거제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시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것 같은데, 여전히 현실정치에 영향을 끼치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찜찜합니다.

김대중씨는 너무 늙으셨습니다. 불편한 다리야 큰 문제가 아니지만 표정에 큰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아마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직을 벗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막내아들은 출옥을 했지만 여전히 둘째 아들이 감옥에 있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자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지요. 김영삼씨와 더불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대부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직을 지냈다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것은 수사적 의미라면 모르까, 실제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 정권 교체에는 김종필씨와의 야합이라는 술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요. 가장 큰 의미는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서 동서 지역 갈등의 한 축인 전라도 사람들의 정치적 한이 풀렸으며, 아울러 결과적으로 그들이 김대중씨에게 갖고 있던 환상의 껍질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김대중씨는 김영삼씨에 비해서 우리에게 놓인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힘이 많았습니다. 스스로 말한 대로 준비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비록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면에서는 아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어쩌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검찰의 수사를 받아야 할 지도 모릅니다.

대표적인 민주투사였던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마저도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비극입니다. 만약 이 두 분이 박수를 받은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훨씬 반듯하게 진보했겠지요. 본인들이야 이런저런 할말이 없지 않겠지만 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일단 그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성취한 업적에 도취해서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아들들 문제가 그렇게 불거질 때까지도 새까맣게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감각을 가진 대통령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발전의 당연한 귀결이며 우리 민족의 행운이기도 합니다. 특히 앞서 두 대통령이 가졌던, 그래서 결국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던 권위주의로부터 벗어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노무현씨는 앞의 대통령들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인물입니다. 생긴 모습부터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 같더군요. 물론 외모가 평범하다고 해서 권위적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시골 농부 같은 외모이지만 전직 대통령 중에서 가장 권위주의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겨울공화국>의 주인이었던 박정희씨를 오늘 우리 국민들이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존경받을 만한 정치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의 반증인지, 또는 실제로 그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국민들이 이중적인 잣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합리성 사고를 갖고 민주적인 절차를 중요시하는 노무현이라는 잣대와 비합리적이며 비민주적이지만 경제 발전을 이룬 박정희라는 또 하나의 전혀 이질적인 잣대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현재 성숙한 국민의식으로 업그레이드 되기 위한 과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를 들으면서 신뢰감을 가졌습니다. 솔직히 그 이전 대통령의 취임사는 아예 듣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이 포함되지 않은, 또는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왜곡된 취임사는 아무리 미사려구로 꾸며놓아도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언어구사는 앞의 대통령들과, 또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던 이들과 그 틀이 전혀 달랐습니다. 조금 유심히 살펴보신 분들은 이런 차이를 감지했을 것입니다. 언어의 존재론적 힘이 담겨 있는 연설이라는 말입니다. 대개의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단지 그럴듯하게 꾸며서 합니다. 심지어 대학 교수들도 그렇게 강의하고, 목사들도 그렇게 설교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감동적으로 강의하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에 실질이 담겨 있지 않아서 공허하다는 말입니다. 무언가를 알고 하는 말과 모르고 하는 말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는 자기가 살아온 삶의 철학이 충분할 정도로 녹아있기 때문에 큰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즉 앎과 삶이 살아있는 언어로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는 노무현을 너무 치켜세운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노사모 회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 한계를 못 보거나 외면할 만큼 순진한 사람도 아닙니다. 어쩌면 노무현 정권에서 경제사정이 오늘보다 훨씬 나빠지거나 남북관계도 악화되고,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동북아 중심 시대가 구두탄으로 끝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의 정책적 오판으로 인해서 우리의 역사가 뒷걸음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가야할 그 길을 분명히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성심성의를 다해 어떤 세계를 향한 꿈으로 자기 마음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 희망을 걸 수 있다고 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 가지만 주문하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국민은 우리의 지도자가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닥달할 것입니다. 어떤 세력은 이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약간의 약점이 발견되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이게 노무현 대통령이 걸려들 수 있는 딜레마이며 올무입니다.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욕과 지금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로 부흥시키겠다는 요구 사이에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물론 둘 다 이루어지는 길이 있다면 가야겠지만, 인간사는 그렇게 굴러가지 않습니다. 한 가지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국민들은 잘 사는 것을 바라니까 지도자로서 표면적으로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렇게 행동을 취하면 결국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는 간혹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일한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입니다. 당연히 그런 세상이 와야 합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려면 약간 국가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일한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는 이 사회구조를 우선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과 경제발전,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런 원칙적인 말은 할 필요도 없겠지요.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물론이고, 청와대 보좌관이나 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면면을 보면 높은 이상과 확실한 현실 감각이 있는 분들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잘해보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은 늘 우리 주변에 있으니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국민들은 공연히 감정적인 편견에 치우쳐 그분이 올라가 있는 나무를 흔들지 말고, 우리의 젊은 대통령 노무현씨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마음껏 펼침으로써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정의롭고, 그야말로 정정당당한 사회가 다가올 수 있도록 서로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이제야 명실상부하게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긴 역사적 순간(Epoche)이 우리에게 도래했으니까 말입니다.

<정용섭,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식을 보고 ...   200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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