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교회로부터의 구원!



한국교회의 빈익빈부익부

어느 집단이든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크고 작음의 차이나, 빈부의 격차가 없을 수 없지만 한국 교회만큼 극에서 극을 치닫고 있는 집단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 지체로 구성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인데도 사람 숫자나 재물의 크기에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이 즐비한 반면에 절대빈곤에 처한 교회들이 부지기수인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그런 차이가 있지만 영적으로 하나라고 설명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교회의 본질과 형태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증거하지 않은 가운데서 막연하게 영적으로 하나라는 말로 우리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치유의 필요성이 있는 것인지, 또는 그게 가능할는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형 교회 안에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소위 개교회가 또 하나의 개교회를 지부로 두는 일이다. 크건 작건 개교회는 그것 자체로 온전한 교회이기 때문에 다른 개교회로부터 지배당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흡사 "체인" 형태의 교회들이 우후죽순 자리를 잡고 있다. 개중에는 이미 상당한 숫자의 지성전을 확보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지역 교회나 노회와 마찰이 생겨서 추진하다가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본인들의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유지하고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는 것만 해도 힘이 부치는 일인데, 또 다른 교회를 관리하고 싶다는 그 에너지는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만큼 선교의 정열이 강한 탓인지, 또는 그만큼 세속적 욕망이 넘쳐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런 문제들은 한국교회의 지엽적인 문제이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이 감수해야 할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다시 새겨볼 필요도 없이 자기 교회의 풍요에 사로잡혀서 절대 빈곤에 빠져있는 이웃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거나,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동정심 정도에 머물고 마는 작금의 행태는 교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위기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거시적 선교의 차원에서도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톨릭 교회가 비록 우리와 다른 교권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단일성이 명실상부하게 살아있다는 점에서 이 사회에서 우리보다는 훨씬 건강한 공동체로 각인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깊은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종파적 차이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수 백개로 분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교단 안에서도 극과 극의 몸집을 갖고 있는 개신교보다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가톨릭 교회를 낫게 평가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주껏 많이 벌어서 잘 쓰다가 죽는다는 이런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사로잡힌 교회구조를 유지한다면 결국 그 기초가 허물어지게 될 것이다.



영성의 훼손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어쩌면 훨씬 심각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숨어 있다. 교회 사이의 빈부 격차로 인해서 목회자의 영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부자 교회의 목회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성취한 업적에 도취되어 버리고,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표를 이루고 말겠다는 욕망과 그것이 좌절됨으로써 일어나는 절망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신자들의 영적인 상황을 돌보아야 할 목사들이 교회를 키울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에 발목이 잡혀서 꼼짝도 못하는 형국인 셈이다. 더구나 당회로 일컬어지는 교회의 교권은 이런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새로운 담임 목사를 청빙할 때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일차적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식의 변화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교회의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제법 충분할 정도로 논의되었으며, 나름대로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상황이 개선될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즉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최저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총회나 노회 차원에서 몇몇 방안이 제시되고 실천되기도 했으며, 비교적 이런 문제에 의식이 있는 목사들이 자발적으로 어려운 교회를 돕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물론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머리를 짜낸다고 하더라도 미봉에 불과하다. 중대형 교회의 목회자나 장로급 평신도들이 교회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이런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의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근본적인 의식의 변화를 부자 교회와 그 구성원들에게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재벌들이 스스로 균형감각을 회복해서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에 봉사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들의 개인적인 도덕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정치, 경제적인 힘이 지배하는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되면 결국 그 힘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최소한의 국제적 합의나 민주적 절차도 외면하고 오직 힘으로만 자기 식의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나선 미국의 부시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에서도 추정될 수 있는 논리이다.



가난한 교회로부터

따라서 나는 부자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교회와 그 목회자들에게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단초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가난한 자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해도 된다.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일어난 1960년대의 해방신학이 경우에 따라서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단계까지 나가기도 했지만 그 기본 영성은 매우 기독교적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한 사람은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부자들이 돈을 풀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구원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 또는 여성신학에 대한 오해가 놓여 있다. 정치적 힘을 통해서 부자를 끌어내리거나, 또는 여성들의 힘으로 가부장적 구조를 개혁해내야 한다는 주장은 일부는 맞지만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민중의 힘으로 기득권 층을 끌어내리면 그 다음에 그 민중의 대표자들이 기득권 층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들을 또 다시 끌어내려야 한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조는 그것이 원만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역시 생명의 영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런 투쟁과 해방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한국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개량주의적 방식, 즉 부자들의 도덕심에 매달리는 방식은 훨씬 문제가 많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위선에 숨는 방식이기 때문에 여기서 종교는 그야말로 아편의 역할을 할 뿐이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를 증오함으로써 이 모순의 역사를 힘으로 분쇄하는 방식이 아니면서도 그 알량하고 위선적인 도덕심에 매달리는 방식도 아닌 "가난한 교회로부터의 구원"은 무엇인가? 그게 가능한가? 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본다. 이 문제를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들에게서 풀어가려고 한다.  



부러워하지 않는 교회

우선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들은 부자 교회를 부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가난한 교회 목회자들이 교회를 키우는 일에만 일구월심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한 부자 교회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업적에 사로잡혀서 결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 너희들도 고생 좀 해봐라. 나도 그런 길을 지나왔거든. 그런 다음에 느끼게 되는 이 성취감을 알게 될 거야." 보통 이런 식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키워야 사람(목사)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부자 교회는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 여기서 너무 상투적인 단어인 "회개"를 어쩌다 쓰게 되어서, 한 마디 보충해야 할 것 같다. 회개는 이 땅에서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는 게 아니라 그런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많은 재물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을 한 어떤 율법사를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문제, 부동산 투기 문제, 또는 증권에 얽힌 문제들이 결국은 화려하게 살아가는 삶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동시에 훨씬 인간적이고 연대감 넘치는 삶을 유지해나간다면 부자들이 자기들의 삶을 반성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군" 하고 빈정댈 가능성이 많다. 당신은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구조적인 악은 구조적으로 투쟁해서 쟁취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주장이 담고 있는 일정한 부분의 정당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며, 나도 이미 이런 투쟁의 대열에 선 경험도 있으며, 지금도 역시 그런 투쟁과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노조의 주장이 완전하게 실현된 세상이 온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볼쉐비키 혁명 이후 70년 동안 러시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전교조의 주장이 완전하게 실현된다면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어떻게 변화되는 것일까? 비교적 좋아지겠지만 그 이상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거창의 샛별 중학교와 거창 고등학교는 전국적으로 모범적인 학교로 이름이 나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전교조에 가입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학교와의 경쟁력에서도 뛰어난 학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도 역시 우리나라의 중, 고등학교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거의 그대로 안고 있다. 일류대학 입시가 그들에게 최고의 관심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내가 노조, 전교조, 민주화 세력, 민중교회들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그들과 같은 길을 갖고 있지만, 단지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해야할 신학적 전망에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뿐이다.



자기 성취감으로부터 해방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가난한 교회의 목사들이 부한 교회를 부러움의 눈길로 보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의 길을 가야 할 이유는 가난한 자로서의 자존심이나,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당파성, 또는 가난 예찬과 같은 관념이나 어떤 사명감 같은 데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명확한 통찰에 있다. 그러니까 큰 교회의 목회가 현실적으로 전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목사들이 큰 교회에서 일하고 싶다는 동기는 사례비를 많이 받아서 자식들 잘 가르치고 노후를 보장받고 싶다는 아주 평범한 욕망이 아니라면 대개는 자기의 목회적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에 있다.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굳이 말 많고 일 많은 큰 교회에서 고생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목회자들이 모이면 대개 교회당을 건축한 이야기, 무슨 전도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었다는 이야기들을 주로 한다. 그게 모두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깊이, 아니면 약간 방향을 틀기만 하면 그 모든 욕망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알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당을 지었다고 하자. 그것이 로마의 베드로 성당만 하겠는가, 쾰른의 대성당만 하겠는가, 바르셀로나의 성가족교회당만 하겠는가? 현대적 감각에 맞는 전원 교회당을 지었다고 하자. 그것이 독일의 곳곳에 있는 교회당만 하겠는가? 설령 그렇다고 하드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물론 교회당의 예술적 가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비교하면 너무나 하찮은, 그래서 전혀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 멋진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불러다가 헌당식을 드리는 순간에는 기분이 고조되기는 하겠지만 그런 흥분은 아침 이슬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것에 쏟았던 인간적 노력의 크기만큼 강한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교회 개척 10년 만에 2천명의 신자들 모았다고 하자. 많은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모범적인 사례가 되긴 하겠지만 그만한 정도의 부담이 그를 짓누르게 된다. 아니면 무엇이 옳고 그른 지도 모르는 망상에 빠져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물론 대형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재정적 능력이 있으니까 선교사도 돕고 미자립교회도 돕고 복지활동도 넉넉하게 펼쳐나갈 수 있다. 목회의식이 반듯한 대형교회 목사들이 이렇게 희생적으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봉사와 복지활동도 역시 목사의 영성을 돕기보다는 훼손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그것이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문제를 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형 교회의 목회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역학적 관계로 작동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에너지가 발현되기 힘들다. 오히려 그것을 훼손시킬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구원론적 목회행위

"그래도 큰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한번 해보고 싶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을 것이다. 좀 생각이 있다는 목사들도, 물론 좋은 뜻이긴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만약 목회를 기업경영쯤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접근해야하겠지만 목회는 오히려 기업원리와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극대화한다거나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비움>이며 <낮춤>, <버림>이다. 아예 출발부터가 기업과는 다르다. 이렇게 비우기만 하면 생명의 영이 우리를 채우신다고 믿는 게 바로 신앙이다. 이런 마당에 교회를 키운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예 신앙의 기초가 없다는 말이 된다. 간혹 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말들을 하지만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이 문제는 상호 변증법적 관계로 설정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있듯이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 놓여 있다. 하나님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목사들은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열심히 좇아 다니는 일보다는 자기 구원을 위해서 매진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구원도 힘든 일인데 무슨 여유가 있어서 남을 돌보는가? 그게 진정으로 남을 돌봄인가, 아니면 자기 욕망인가? "자기 십자가를 지듯이" 우리는 자기 구원에만 천착해 있을 것이며, 그럴 때 다른 사람의 구원은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다. 구원의 존재론에 들어가 있으면 그 이외의 일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끌어가신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세상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죽도록 충성하라"는 요한의 예언을 따라서 교회 부흥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런 문제로 더 이상 논쟁할 필요는 없다. 성서 말씀을 서로 다른 층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언어 소통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마디만 강조하자. 만약 가난한 교회의 목사들이 부자 교회를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한국교회의 개혁과 구원의 물꼬는 그들로부터 열릴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여기면서 그 자신 안에 하나님의 실재를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빛을 비추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맛을 내면서 그분을 반영할 것이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 안에서 빛날 것이다. 그는 무심과 포기,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바 늘 현존하시는 주님에 대한 전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참된 타는 목마름의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다른 일들에 마음을 쓴다 하더라도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그의 계획과 생각과 직업이 무엇이든, 마신다는 관념은 그 목마름이 지속되는 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목마름이 커지면 커질수록 마심의 관념은 더욱 생생하게 될 것이며, 더욱 깊게 자리할 것이며, 더욱 현존하게 될 것이며, 더욱 지속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으로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다른 어느 것도 그를 감동시킬 수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더 이상 아무 것도 찾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무엇을 애쓰며 무엇을 행하든, 그가 사랑하는 그 무엇인가는 그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디서나 그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것에 대한 사랑이 자랄수록 그것은 더욱 생생해질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으므로 쉼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레리몬드 B. 블레크니 편, 이민재 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다산글방, 40,41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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