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농업 문제



지금 내 책상 위에는 9월25일자 '한겨례 21'의 32,33쪽이 펼쳐져 있다. 이슈추적이라는 꼭지로 편집된 이 글은 '그래도 농민은 살아야 한다'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세 장의 사진이 올라있다. 32쪽 하단의 사진은 9월14일 멕시코 칸툰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의 합의 도출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각국의 비정부기구 회원의 환호하는 큼직한 모습이고, 33쪽 중간에 실린 두 장의 사진은 이와 다른 처참한 모습이다. 하나는 9월10일 한국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세계화에 반대해 할복한 뒤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시위자들과 경찰들과의 사납게 싸우는 모습이다.

먼저 합의 도출을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계무역기구(WTO)는 원칙적으로 모든 무역 거래에서 국가가 개입하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무역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국제조직이다. 이런 자유무역 체제를 가리켜서 '세계화'라고 부른다. 유럽연합은 지금 상당한 수준에서 국가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국가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명실상부하게 '세계화'가 가능한지가 일단 의문스럽다. 이런 기구는 결국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경쟁을 자유체제에 놓음으로써 선진국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 같다. 그래서 공산품보다는 농산물에 의존하고 있는 개도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국의 농산물 관세를 대폭 내리거나 없애도록 요구해왔다. 이런 문제들이 바로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다루어졌다. 그런데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는 공산품 생산도 뛰어나고 농산물 생산도 잘 되기 때문에 모든 관세를 철폐하는 쪽으로 밀고 나가고 싶겠지만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공산품에 비해서 농산물의 경쟁력이 턱없이 낮기 때문에 입장이 아주 난처하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같은 것은 그래도 우리가 팔아먹을 수 있을 만큼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예컨대 쌀은 아예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상태이다. 그러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상태이다. 우리 협상단의 전략은 당연히 공산품과 농산물을 구분하는 데 있다. 공산품의 관세는 낮추고, 농산물은 그대로 유지하는 이중관세 원칙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WTO 체제하에 남아있을 생각이 있다면 무조건 우리에게만 유리한 쪽을 밀어붙일 수는 없다. 이번 각료회의에서 합의가 도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환호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는 이런 WTO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자유무역 체제로 인해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같은 농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 일본의 입장과 칠레나 브라질의 입장은 상반된다.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철폐된다면 칠레나 브라질 농민들은 수입이 훨씬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누구인지 자세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에 대해 말할 입장이 못된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수렁을 건너뛸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입을 다무는 게 최소한의 도리이다. 다만 숨을 거두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온하게 보이는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아직 이 WTO의 정체가 물신(物神)의 보편화인지, 아니면 세계 경제의 효율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필요악인지 분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느 수준에서 항거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감을 잡을 수 없다. 다만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 생명력을 손상하지 않는 그런 체제와 제도와 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만 있을 뿐이다.

고 이경해 씨가 평생을 몸바친 한국 농업의 상황은 앞으로 틀림없이 산너머 산에 처해질 것이다. 현재 쌀값에 비해 3분의 1이나 4분의 1 가격에 호주, 미국, 중국 쌀이 관세 없이 들어오게 되는 날에는 그 결과가 참으로 끔찍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만 특별 대우를 해달라고 무한정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동차와 티브이, 반도체를 수출해서 먹고살아야 할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WTO 체제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처음 우루과이라운드가 발동하기 시작한 10년 전부터라도 우리의 농업이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착실하게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준비가 너무나 부실했다는 데에 있다. 우리 농민들이 농사에만 충실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묘안은 없는가? 마음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10년 전인 1993년 12월에 나는 현풍제일교회 소식지 '비슬칼럼' 란에 우루과이라운드에 관해 두 편의 글을 실었다. 그 중에서 12월 5일자로 실린 "쌀 개방, 무엇이 문제인가"를 여기에 다시 옮겨보겠다.



요사이 쌀 개방 문제로 인해 대한민국 전체가 온통 야단이다. 냉해와 추곡가 실랑이로 그렇지 않아도 마음 쓰라린 농부들이 때아닌, 사실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쌀개방 때문에 볏단을 불사르기도 하고 농기계를 반납하면서 개방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농대 교수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 농수산위원회는 여야 의원들 사이에 저잣거리의 싸움질처럼 난장판이 펼쳐졌다.

농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더구나 국제 경제질서에 대해서 거의 까막눈이라 할 목사가 쌀개방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섣불리 뇌까린다는 것이 무모한, 그리고 무례한 소치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말해야 하지 않느냐는 책임감(?) 때문에 짧은 소견일지라도 용기를 갖고 언급해 보고자 한다.

쌀은 우리 배달의 겨레가 조상 대대로 주식으로 삼아온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쌀개방은 경제적인 논리보다는 우선 정서상의 문제가 앞선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가정제품이나 자동차, 대리석 같은 건축자재, 의류, 심지어 쇠고기나 담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수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쌀 수입이라는 상황 앞에서 우리 국민이 느끼는 절망감 내지 분노는 다른 어떤 논리적 답변으로도 상쇄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쌀개방은 우리의 정서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쟁력이라는 면에서도 다른 품목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경쟁력이란 기본적으로 그 품목의 성능과 값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쌀은 우리가 미국이나 캐나다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품목이다. 그렇다고 쌀 소비를 줄이거나, 아니면 오늘날과 같은 개인주의 시대에 애국심 운운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벤츠 승용차는 수입이 되더라도 워낙 비싸기 때문에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가 그것과 경쟁할 수 있다. 쇠고기의 수입도 처음에 예민한 문제였지만, 우선 한우가 수입고기보다 훨씬 좋은 맛을 내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한우 농가에서 더 좋은 육질을 개발하도록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쇠고기 수입은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담배 수입은 어떤가? 양담배가 국산보다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은 없다. 값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나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그럴듯한 외국 모델의 선전공세 때문에 청소년층과 외국 선호적인 사람들이 즐겨 필지 모르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쌀은 우선 값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아는 바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쌀 생산비가 우리에 비해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미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듯이 수입쌀이 경기도 여주, 이천의 '아끼바리' 만큼이야 할 수 없겠지만, 그 질의 차이가 값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다. 더구나 앞선 기술로 그 나라에서 우리 입맛에 맞는 쌀을 대량 생산한다면 우리와 같이 주로 소농이나 중농으로 이루어진 영세한 농업구조로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 결국 쌀개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언젠가는 수 천년 동안 지어오던 벼농사를 때려치우고 호주나 미국, 그리고 캐나다에서 수입된 값싼 쌀을 사먹고 살게 될 것이다.

쌀개방을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전체 인류가 앞으로 가족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요사히 흔히 회자되는 '글로벌 스피릿'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인간이 지역이나 민족을 뛰어넘어 지구 전체를 하나로 생각하는 삶의 자세이다. 그렇게 될 때 지역별로, 혹은 국가별로 생산성 높은 업종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키고 그것을 정의롭게 분배하게 되면 모든 인류가 결국 값싸게 먹고 쾌적한 문화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금년 안으로 타결될 것으로 전망되는 우루과이라운드의 근본 취지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비옥한 땅이 많은 나라에서는 농산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우리나라나 일본같이 작은 국토를 가졌지만 산업이 발전된 나라에서는 공산품이나 가공식품을 주로 생산하게 되면 서로가 유익하다는 말이다. 한 나라가 모든 인간의 필요 상품을 가장 저렴하게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초원리에 속한다. 만약 이렇게 상부상조의 국제질서가 잘 진행될 수만 있다면 우루과이라운드는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는 어디까지나 민족 이기주의로 흘러갈 위험성이 농후하다. 우리가 농사를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전자제품 단일 품목으로 세계경제를 휘어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먼 후일 언젠가 국가간의 신뢰가 상실되고 질서가 허물어졌을 때 농산물을 우리에게 수출해야 할 나라들이 그것을 무기화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컴퓨터나 비디오가 없이는 살아도 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절대로 쌀개방을 거부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바로 공산품 수출에 목을 걸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우리 정부의 딜레마이다. 자동차와 텔레비전 수출은 기를 쓰고 하면서 그 나라의 쌀을 수입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부도덕한 일이다. 이미 쌀 개방을 결사 반대할 수 없는 국제적 대세가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명분이 충분하지 못한 결사불가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나라의 생존권을 확보하면서 세계적인 대세에 발을 만출 것인지 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작 문제는 쌀개방을 수용하는가, 않는가가 아니라 그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해 온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농업정책의 졸속에 있다. 수출산업만을 육성했지 농수산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수십 년 간 방관하다가 갑자기 농산물 개방이라는 파고를 만나 허둥대는 모습니다. 경쟁력은 하루 이틀에 제고되지 않는다. 이미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쌀 농사를 생산성에 상관없이 장기적인 정책 안에서 살려나가야 한다.

경상도 사람들은 쌀을 '살'이라고 발음한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야말로 쌀은 우리 민족의 생명인 살肉)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