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실업문제에 대해서



아이엠에프 이후로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수입 감소, 실업률 상승, 빈익빈부익부 양극화 등등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 이슈가 되었지만, 사실 현대 국가 치고 이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는 나라는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경제 대국인 미국이나 일본이 그렇고, 비교적 안정적 시스템이 운용되고 있는 독일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차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차이이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예컨대 실업률이 10% 이상이 되어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국민들이 있는 반면에 5%만 되어도 나라가 거덜날 것처럼 요동치는 국민들이 있다. 인도 사람들은 실업률이 2,30% 이상이 되겠지만 그것 때문에 그 나라가 불안하지 않다. 우리의 눈에는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우리처럼 1,2%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신을 놓치는 게 옳고 지혜로운 건지, 아니면 인도 사람들처럼 그런 것에 대해 둔감한 채 어떤 영적인 세계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게 옳은지는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자기의 인생을 어떤 숙명적인 힘에 무조건 맡겨버리는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모든 경제, 정치적 현상에 대해서 일희일비하는 삶의 태도로는 아무리 바람직한 사회가 도래한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런 바람직한 사회가 어떤 기준에 따라서 판단되어야 하는지, 과연 그런 사회가 인간에 의해서 구현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똑같이 감기에 걸렸지만 갑이라는 사람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지만 을이라는 사람은 큰일이 난 것처럼 법석을 떤다.

요즘 모두들 실업문제, 특히 청년들의 실업문제로 인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이다. 실제로 그렇게 위급한 건지 아니면 경제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현상을 부풀린 것인지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타당한 정보이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보의 정확성 여부는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전문가들과 그것에 직간접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현상 앞에 놓여진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가 바로 나의 관심사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사안의 중대성보다는 그것이 가져올 이해타산에 따라서 사람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정말 우리의 모든 삶을 걸고 투쟁해야 할 핵심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른다.

다시 오늘 주제로 돌아가서, 나는 청년의 실업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청년 실업문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학 졸업생이나 졸업 예정자들의 문제에 속한다. 그들에게 정말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일까? 요즘 또 한 차례 사회 문제로 대두된 외국인 노동자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중소 기업체는 노동자들을 구하지 못해서 어려움이 크다. 따라서 절대적인 일자리가 부족하다기보다는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가 부족할 뿐이다. 대기업의 좋은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면 한 단계 낮추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더 낮추면 된다. 만약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일하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얼마든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깨끗한 사무실에 앉아서 높은 연봉을 받아야만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청년들의 문제는 국가가 해결해줄 수는 없다.

물론 내가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순박한 말만 지껄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똑같이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은 그럴듯한 일자리를 찾았는데 자기만 현장 노동자로 살아가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놀고 먹으면 놀고 먹었지 먼지 뒤집어쓰고 연봉도 시원치 않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내 딸들이 앞으로 직장을 구할 때 가능한대도 그럴듯한 직장을 구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그렇지만 경쟁 체제에서 모든 이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런 경쟁 체제에서 살아간다면 자기가 최선으로 자기 길을 뚫을 것이며, 만약 경쟁에서 떨어졌으면 낮은 단계의 일거리를 찾으며 된다. 자기가 원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경제 형편이나 노동현장은 노동을 함으로써 나름대로 인간적인 삶을 펼쳐나가는 데 결정적으로 부적합하지는 않다. 크고 작은 지엽적인 문제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문제들은 시나브로 고쳐나가면 되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건강한 사람이 육체 노동이라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나라 안에서 살아갈 길은 있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도시에서 일자리가 없으면 젊은 노동력이 끊겨버린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면 된다.

요즘에는 목사의 실업률도 대단하다고 한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무시하고 선교라는 미명 아래 목사를 대량으로 배출한 욕망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나는 목사들이 반드시 목사의 일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가능한대로 자기가 전공한 부분이고, 나름대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명감 때문에 교회 조직 안에서 일거리를 찾아보는 게 좋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성직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면 된다. 영업용 택시 운전사가 되든지, 아파트 경비원이 되든지, 공장 노동자가 되는 것도 좋다. 신학대학교를 나왔으니까, 그리고 목사가 되었으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교회에 빌붙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렇게 건강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형 교회가 목사의 일자리를 늘려 가는 것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괜찮은 일이기는 하다. 신학연구소나 목회연구소를 운영하거나, 복지 활동에 투자하는 것도 그런 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일자리를 늘린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으니까 목사 스스로 최선의 기회가 없으면 차원의 길을 찾아서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 반드시 교회 일을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 실업 문제가 이렇게 현안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노동에 대한 인식의 왜곡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노동이 갖고 있는 원래의 창조적 성격이 이제는 단순히 경제적인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노동이 존재론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창조적 기쁨과 그것을 통해서 주어지는 경제적 대가를 그렇게 엄격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창조적 기쁨을 경험하면서도 경제적인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이 양자가 고유하게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왜곡이다. 전적으로 경제적인 기준으로만 노동을 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런 가치관에 빠져 있는 한 젊은이의 실업률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무엇일까? 젊은이들에게 노동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이 시대에 말이다. 너무나 원칙적인 주장인지 모르지만 연봉의 차이를 현격하게 줄여나가는 길밖에 없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젊은이나 주물공장에 취업하는 젊은이나 비슷한 시간을 일하면서 비슷한 연봉을 받을 수 있다면 그래도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지 않겠는가? 이 문제는 젊은이들의 실업만이 아니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길이면서 궁극적으로 이 사회가 지향해야 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노동의 효율성이 저하될 것이라고 염려하는 경제학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세계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문제는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달려 있다. 가난하지만 정의로운 사회인가, 정의롭지 못하지만 풍요로운 사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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