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강요하는 사회 앞에서



정부 경제 부처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의 무역 수지가 지난 수년이래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몇 년 전 아이엠에프를 당한 원인도 따지고 보면 외국에서 빌려온 단기 펀드의 이자를 갚을 달러가 부족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한 해를 마감하면서 달러를 많이 남겼다는 것은 어쨌든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경제 상황이 지난 아이엠에프 때보다 훨씬 나쁘다는 말들이 많다. 주로 내수 경기가 침체되어있다는 게 핵심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우리의 경제 형편이 어렵다고 말하는 경제 전문가들의 진단과 매스컴의 보도가 옳은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현상을 부풀리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녀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이를 위한 사유교육비가 천문학적으로 지출되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핸드폰을 사용하고, 결혼 한번 하는데 수 천만원씩 들이고 있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투기가 극성을 부렸고, 지금도 여전히 해외 골프 여행을 나서는 이들이 장사진을 친다.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닌데도 과도하게 지출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경제 침체는 거짓말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카드회사의 부도 위험성과 수 백만명의 신용불량자 등을 보면 어딘가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부의 절대적 부족이기보다는 그것의 소통이 정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돈의 흐름이 왜곡되어 있으니까 없는 사람들은 훨씬 힘들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재테크의 기회로 삼게 된다. 아이엠에프 때 고금리가 실시되자 융자를 받았던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깡통이 되고 여유자금이 많던 일부 사람들은 돈방석에 앉은 현상과 비슷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무역수지는 괜찮았지만 내수가 침체되어서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진단과 내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늘 절약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거의 강박관념처럼 지니고 있던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60년대에 별로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일단 먹거리조차 부족한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일거리가 별로 없었던 겨울철 점심은 대개 찬밥 한 그릇에 충분한 물을 넣고 끓여 여러 식구들이 훌훌 들이키듯 먹었다. 겨우 두 세끼니 만 먹을 수 있는 봉지쌀 심부름을 자주 다녔다. 그때의 겨울은 왜 그렇게 추었든지 모르겠다. 방안에 있는 걸레가 얼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배고프고 추울 때의 고독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 안다. 공책이나 연필도 많지 않아서 얼마나 아껴가며 학교를 다녔는지 모른다. 손에 쥘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진 몽당연필을 붓 뚜껑 같은 것을 끼어서 사용했다. 성한 양말을 신고 다니는 아이들은 내 주변에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전기료를 아끼느라 낮은 촉수의 백열등을 킨 방안은 침침했지만, 그래도 그 밑에서 매일 저녁 어머니와 나는 양말을 꿰매곤 했다. 작은 구멍이야 몇 바늘만 돌리면 되지만 약간 넓게 뚫린 구멍은 좀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끊어진 백열등을 양말 안쪽으로 밀어넣어 양말의 뚫어진 부분을 드러나게 한 다음, 한 올 한 올 짜깁기하듯 꿰매야 한다. 그런 정도로 해결할 수 없는 양말은 달아 없어진 부분에 다른 천을 바쳐놓고 빙 둘러가며 꿰매야 한다. 옷도 역시 거의 걸레처럼 못쓰게 될 때까지 입고 다녔다. 이런 습관이 아직도 남아서 집사람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이런 마당에 소비가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첩경인 것처럼 말하는 경제 전문가들의 충고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물론 그들의 논리는 누가 들어도 이해가 갈 만큼 명백하기 때문에 내가 심정적으로만 시비를 걸지 논리적으로는 할말이 별로 없다. 승용차나 티브이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면 대리점을 운영하는 사람들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자동차나 티브이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일거리가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수입과 지출이 감소될 수밖에 없다. 외식산업도 불경기를 맞게 되고, 극장가의 손님도 줄고, 과일도 적게 팔린다. 결국 이런 불경기가 나라 전체에 파급됨으로써 소위 경제 공황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경제 공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늘 일정한 정도의 소비가 유지되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경기 부양책을 쓰기도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우리의 경제 구조는 군사 독재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병원의 응급실처럼 응급 처치에 젖어왔다. 지난 시절에는 주기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렸고, 최근에는 카드 남발로 내수가 활성화되었다. 전체 나라 살림의 크기가 별 볼 일 때는 이런 응급 처리가 유효 적절하게 먹혔지만 이제 세계 경제권에서 어느 정도 큰 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커진 마당에서는 그런 방식으로는 견뎌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자린고비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풀어가기에는 우리의 경제구조가 지나칠 정도로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여러 요소들과 맞물려 있다. 한쪽 길이 막히면 그 여파가 전체 도시에 파급되는 도시의 교통환경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경제 문제도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통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소비의 적정 수준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정도로 소비하고 사는 게 적정한 수준일까? 소비 문제야말로 개인적인 주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수치로 제시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10년 동안 양복 한 벌이면 충분한 반면에 다른 사람은 2,3년에 한 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집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외식을 하지만 어떤 집에서는 두 세달에 한번의 외식으로 만족한다. 그렇다면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가치관에 맡겨둘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책적으로 소비를 진작시킬 수 있는 길이 모색되지 않는 한 돈을 별로 쓰지 않는 사람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 물건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기부양책을 쓴다는 것도 역시 한계가 있다. 그것이 지나칠 경우에는 그야말로 거품경제 현상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승용차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10년 거치 10년 상환의 무이자 융자를 전액 제공한다고 하자. 아마 당장 승용차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차를 사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당연히 자동차 산업이 호황을 맞게 되고, 덩달아서 다른 산업도 잘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것은 흡사 맹장 환자에게 진통제만 놓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빚게 된다. 얼마가지 않아 이 환자는 복막염으로 진행되어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결국 오늘의 경제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다. 소비가 얼어붙어도 문제이고 과소비도 역시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 경제에다 무조건 맡길 수도 없고, 관치(官治)로도 완전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에 젖어들어 끝없는 욕망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그 악순환의 길이 곧 소유지향적인 현대인의 삶에 필연적으로 주어진 길이다. 물론 경제 선진국은 나름대로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이 안고 있는 문제가 자신들의 것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이 세계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공동체(글로벌 컴뮤니티)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기회를 잃기 전에 우리는 경제 지표에 따라서 일희일비 할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만 한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단초는 소유의 부족에 있지 않고 지나친 경쟁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소유와 경쟁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생명과 존재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 전이를 가장 역동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은 우선 종교다. 특히 예수의 부활로 선취된 종말론적인 구원과 생명에서 자기를 해명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오늘 이런 일에 앞장서는 일 말고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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