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용의 삶 벗어나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단 한번이라는 점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경우에 따라서 부자로 태어나거나 가난하게 태어나는 일이 있고, 머리가 명석하거나 약간 모자라게 태어나기는 하지만 모두가 소중하기는 머리카락 하나의 차이도 찾아볼 수 없이 똑같다. 이왕에 태어난 생명이라면 가능한 대로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게 마땅할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뻔한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애쓴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행복한 길이라고 생각한 그 길이 행복한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점을 좀 심각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의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투자한 노력이 그 조건에 비해서 지나치게 많을 경우에는 결국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손해인 셈이다. 삶이 수학 계산처럼 손익의 구도에서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약간만 생각을 집중하면 대략적인 구도는 우리 손에 들어온다. 여기서 잠시 우리 삶이 손해로 계산될 수밖에 없는 고비용 구조가 무엇인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 전체 국민이 가장 심하게 비용을 들이는 부분은 자녀들의 교육이다. 매년 입시철만 되며 사교육비의 폐해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말들이 참으로 많다. 이번에도 정부에서는 획기적인 사교육비 절감 대책을 내놓았는데,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티브이 교육방송 프로그램에 실질적인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학교 보충수업을 내실화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학생들이 학원이나 개인교습을 받지 않더라도 대학입시 준비에 아무런 문제나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오죽 했으면 정부에서 이런 방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지만 이런 제안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결코 될 수 없다. 단지 사설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을 학교와 교육방송 앞으로 끌어낼 수 있을 뿐이지 (그것도 사실은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그것으로 사교육비 자체가 말 그대로 획기적으로 줄어들거나 대입 제도의 왜곡현상이 정상적인 상태로 교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이 우리의 교육 구조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우리의 교육 구조가 왜 고비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정리하도록 하자.

일단 국가 전체적인 크기에서 볼 때 대학생들이 양적으로 너무 많다. 국가 경영에 별로 필요 없는 부분에 돈이 과용됨으로써 결국 국가의 경쟁력이 저하된다. 80만 명의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서 20만 명 정도는 대학을 가고, 30만 명은 순전히 기술을 배우는 전문학교로 진학하고, 나머지 30만 명은 직접 직업을 갖는 게 국가 경영의 합리적 구조라고 하자. 그런데 이 사회가 50만 명에게 대학교육을 시킨다면 이것은 분명히 국가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고비용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처럼 학력간의 임금 격차가 심한 사회에서는 대학교육의 과투자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교육의 고비용 구조를 뜯어고치려면 결국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길밖에 없다. 아마 교육 당국자나 기업과 노조 관계자들도 이런 상황을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임금 격차를 줄여나갈 수 있는 길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현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들을 관리하거나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 또는 기업의 사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간부급 직원들이 회사에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온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는 참으로 요원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해낸다고 하더라도 교육의 고비용 구조는 해결될 수 없으며, 이렇게 교육비에 부담을 갖고 사는 한 우리는 더불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훨씬 많이 놓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또 하나의 부분은 자식 결혼이다. 위에서 언급한 교육도 자식 문제였는데, 이 부분도 역시 자식 문제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거의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서만 운영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기회에 이 결혼의 고비용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간단히 한두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일단 결혼식 자체에 소모적인 내용이 지나치게 많다. 친소를 불문하고 안면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결혼식장의 하객으로 불러모으는 것 자체가 우선 고비용이다. 이미 당사들이 그런 하객으로 불려 다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능력이 닿는 한 많은 하객들을 결혼식장으로 끌어들인다.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전날 미리 경치 좋은 곳에서 비디오 및 사진 촬영하는 것도 역시 고비용이다. 결혼식을 신랑과 신부만이 아니라 오히려 양쪽 집안의 일로 여기던 옛날이라면 모든 힘을 결혼식에 쏟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아주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가면서 결혼식만은 농경사회의 전통에 충실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심리적 분열 현상이 아닐까 모르겠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통을 지키려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어떤 점에서 거룩한 사건이라 할 결혼마저 상품논리로 간주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고착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삶의 고비용이 어디 이런 것 만인가? 여성들의 외모에 투자하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이야 남이 이러쿵저러쿵 할 바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있기만 해도 아름답게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 성형수술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이 현실은 참으로 서글프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의 여성들만큼 화장을 많이 하는 여성들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 오래 살았던 어떤 일본 여자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자기가 처음 한국에 와서 놀란 일 중의 하나가 가정주부들의 진한 화장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 그런 진한 화장은 술집 여성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한국 남성들은 정력 보강을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쓴다. 진한 화장의 여성이나 비싼 정력제를 먹은 남성들이 그런 것으로 행복할까?

그 무엇보다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신앙생활의 고비용이다. 이 세상이야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가니까 그렇다 치고, 좀 속된 표현으로 생명의 엑기스를 마시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고비용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다. 헌금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이나 예배가 너무 자주 있다는 점들은 여러 사람이 거론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다. 수백만 원의 강사료를 지불하면서 탤런트나 유명 강사를 데려다가 교회 안에서 흡사 개그 콘서트 같은 행사를 벌일 필요가 있을까? 일년에 4,5천만 원의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해외선교사를 파송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해외선교 자체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들어서서 각 교단마다, 각 대형 교회마다 고비용이 들더라도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행사가 유행병처럼 번진 그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 우리 교회도 역시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돈을 쏟아 붓고 있는 치맛바람의 주인공들처럼 공연한 일에 자기 삶을 소진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고비용의 삶 벗어나기',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완전한 답을 나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각자가 삶(life, 生命)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곰곰이 생각한 다음에 그것에 상응하는 가치와 판단으로 살아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데는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또 그 소리?"라고 냉소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그거야 영적인 면에서만 그렇지!"라고 이원론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내가 더 이상 할말은 없다. 독백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일에 고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실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비용을 적게 쓰면 적게 쓸수록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가 훨씬 깊고 넓게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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