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4월25일 오전인데, 봄비가 무척 많이 내립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시에도 많이 나오고, 팝송이나 대중가요에도 많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시조나 단가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봄비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적 삶에 친숙한 현상이겠지요. 이 봄비에 대한 느낌은 받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느낌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외로움의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보통의 맑은 날과는 색다른 감흥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함박눈이 내리는 날도 특이하고, 눈이 시릴만큼 푸른 하늘이 보이는 날도 새롭고, 낮은 먹구름이 뒤덮힌 날도 자극적이긴 하지만, 봄날 내리는 비는 유난히 낭만적인 감정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훨씬 친근합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날, 좋은 사람과 같이 분위기 좋은 까페에서, 물론 그 까페의 창가에 앉으면 봄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이 영화의 자막처럼 눈 안에 들어와야 하지만, 향과 맛이 좋은 커피를 마시며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싶어하겠지요. 그렇게들 해보시지요. 우리 인생에서 기억하고 싶은 추억으로 자리가 잡힐 겁니다.

그러나 나이가 든 저는 좀 다른 차원에서 오늘의 봄비를 바라봅니다. 좀 따분한 생각같긴 한데, 이 지구에 언제부터 비가 내렸을까요? 지질학이나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별로 깊지 않아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설명해보려면 한참이나 책을 뒤적여보아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내버려둘랍니다. 전문가가 아닌 주제에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냥 상식적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유용하기도 하고, 훨씬 옳을 때도 많습니다. 46억년 전에 태양의 자식으로 이 우주 가운데 출현한 지구에 산소와 수소의 결합으로 인해서 물이 생기고 그것이 다시 수증기 형태로 공중의 올라갔다가 대기의 불안정으로 다시 지표면으로 쏟아지게 된 게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 태양과 똑같이 불덩어리였던 지구가 최소한 표면만이라도 지금과 같은 고체형태를 취해야 하고, 그 온도가 적정한 수준까지 내려와야 하고, 물 분자를 형성할 만큼의 수수와 산소가 생성되려면 우리의 상식으로 감을 잡을 수 없을만큼의 긴 세월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모든 행성에 물이 생성될 수는 없습니다. 간혹 위성의 탐사 보도에서 알려지듯이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도 지난 날 물이 있었다는 흔적이 발견되고 있긴 하지만, 현재는 오직 지구에만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물의 존재 가능성은 매우 낮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주 가운데서 지구처럼 물이 풍부한 별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이 지구에만 있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서 늘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까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저의 눈에는 물이라는 이 물질이 참으로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지구의 보물입니다. 일단 물이 있기 때문에 지구의 생명 현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도 역시 70% 정도가 물이라고 하듯이 모든 생명체의 기본은 물입니다. 물이 있어야만 탄소동화 작용을 일으키는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도 역시 물이 신진대사의 기초로 작용합니다. 결국 온 세상의 생명은 곧 물의 현상입니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이야기 같은데, 지구의 생명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군요. DNA가 물에서 나왔다는 말이 됩니다. 태아가 자라는 여성들의 자궁도 역시 물의 세계입니다.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듯이 한 인간도 역시 물에서 시작합니다.

저는 세면대에서 손이나 몸을 씻을 때 내 손과 몸을 타고 내리는 물의 감촉을 깊이 느껴보려고 모든 감각을 그것에 집중시키곤 합니다. 물은 지구 상의 다른 물질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두 손을 모아서 바가지처럼 만들어 물을 받아보십시요. 어느 정도까지는 물이 우리의 손 안에 남아 있습니다. 큰 손에는 많은 물이, 작은 손에는 작은 물이 자유롭게 담겨 있습니다. 모았던 손을 떼내면 물은 금방 밑으로 쏟아집니다. 샤워를 할 때 머리로부터 발까락까지 흘러내리는 물의 느낌을 생각해보십시요. 계곡을 자유롭게 흘러내리듯이 샤워 꼭지에서 우리 머리에 떨어지는 물줄기는 우리의 온 몸을 흡사 뱀처럼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갑니다. 그 어떤 물질도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물만이 자신의 형체를 고집하지 않고 타자에 따라서 자신을 자유롭게 변형시키면서 흘러내립니다.

헬렌 켈러의 어릴 적 이야기라고 합니다.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헬렌 켈러는 어느 한계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의 손 바닥에 자신의 손을 겹쳐놓고 손가락의 놀림으로 영어의 알파벳을 익혀주고 그 알파벳을 조합함으로써 사물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인식시켜주려고 했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따라서 말을 못하던 헬렌 켈러가 언어와 사물을 일치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설리반은 헬렌 켈러를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펌프 앞으로 데리고 가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헬렌 켈러의 손을 갖다대고 "water!"라는 단어를 그의 손 바닥에 써주었습니다. 그 순간에 헬렌 켈러는 사물과 이름이 일치된다는 그 현상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굳이 물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헬렌 켈거의 의식이 발전됨으로써 이런 깨달음이 올 수 있었겠지만, 물이라는 사물의 그 독특성 때문에 이런 깨달음의 순간이 빨리 온 게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구에는 그냥 물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름으로 변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땅에 쏟아지는, 아주 신비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한 물리학적인 현상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할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사건들과 현상들은 어떤 필연으로서가 아니라 우연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는 자연과학적인 접근 방식은 현상에 대한 단순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지 그 그원에 대한 해명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추상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론이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생명의 본질로 들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추상적인 곳으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저는 자연과학적인 방식과 세계이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열어가는 생명 세계의 한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물 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분석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이미 하이데거가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 바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것이 우리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도 생명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고 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봄비 내래는 풍경을 보고, 그 소리를 듣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봄비를 맞으며 걷고 싶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비 맞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우산 없이 학교에 갔다고 중간에 비가 내려서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고, 물에 빠진 새앙쥐처럼 집에 들어온 적도 있고, 어떤 때는 일부러 친구들과 같이 비를 맞으며 물장난질을 했습니다. 자연과 일치되는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럴 때가 인간에게는 가장 자유로운 순간입니다.

앞으로 이 지구에 언제까지 비가 내릴지 모르겠습니다. 과격한 생태학자들이 염려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 비가 내릴런지, 또는 지구의 사막화의 속도가 빨라져서 일년에 하루 이틀밖에 비오는 날이 없어질지 모릅니다. 갑작스러운 우주적 대재앙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이 지구는 아주 오랫동안 비를 뿌리겠지요. 특히 오늘같은 감미로운 봄비가 내리겠지요. 그래도 언젠가는 비가 없는 날이 지구에 도래합니다. 태양이 지금까지 먹은 만큼의 나이를 먹게 되면 적색거성이 되어서 주변의 모든 자식들을 삼켜 버리겠지요. 아주 먼, 대충 50억년 이후에 일어날 일이긴 하지면 아주 확실한 미래입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이 지구에 깨끗하고 달콤한 봄비가 계속 내릴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구를 못살게 굴지 않고 내 버려둔다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이 지구는 생명 운동을 가열차게 펼쳐나갈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방식으로 이 일에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봄비야,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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