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며 ......



현풍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해서 지금 하양에 살면서도 계속 자전거를 탄다.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하거나 약간 거리가 먼 곳을 갈 때만 제외하면 사시사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왜 자전거를 타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필요로 없이 아주 일반적인 이유에서이다. 일단 하양처럼 작은 마을에서는 승용차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주차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서 좋다. 뿐만 아니라 별로 생태학적 영성이 깊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승용차를 끌고 다닐 때 불안하게 다가오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어서도 좋다. 그런데 다른 지역도 거의 비슷할 실정이지만 하양에서 자전거 타기는 여러 면에서 불편하다. 일단 차도와 인도가 좁아서 자전거가 다닐 공간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점이 제일 크다. 대충 차도와 인도를 곡예사처럼 자유자재 들락거려보지만 재미는 있어도 별로 편한 상태는 아니다. 독일처럼 자전거도로가 완전히 다르게 확보되어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리 실정에 그건 분에 넘치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있는 도로 형편에서나마 자전거를 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끌고 나갈 때는 마음이 불안하다. 막내딸은 자주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이나 비디오 대여점을 들락거리는데, 그럴 때마다 잔소리처럼 차 조심하라고 일러둔다. 평일의 저녁 무렵이나 특히 장날에는 이 하양 읍내에 사람과 차와 자전거가 서로 뒤엉켜 있을 때가 많으니 내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흔하게 들었으니까 그만 두기로 하자. 며칠 전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에 하양교 위에서 느꼈던 새로운 감동을 잠시 되새겨볼까 한다. 왼편으로는 환성산이 올려다 보이고 오른 편으로는 대구 영천 간 국도와 철도가 내려다보이는 그런 길목을 가로질서 하양천이 흐르고 있는데, 나는 그 위에 난 다리 위를 흥겹게 자전거로 천천히 그러나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달리고 있었다. 다리 가장 자리로 난 인도에는 과일, 모자, 바지 등등을 파는 행상인들이 자리를 확보하고 사람들은 그 사이를 용케도 피해서 지나다니고 있었으며, 승용차와 짐차들도 역시 자기들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늘 흔하게 보아오던 풍경이다. 그런 풍경의 한 구석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두 바퀴만 갖고 넘어지지 않고 굴러가는 내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움직이는 바퀴가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물리학적으로 무슨 용어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면 다시 중심이 잡히는 이런 운전 요령을 터득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려가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가끔 내 언행에 면박을 주는 막내딸이 이 글을 읽으면 별 것도 아닌 걸 놓고 그렇게 "오버" 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엄청난 사건을 놓고 내가 오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은 중심을 잡을 줄 안다는 뜻이다. 아무리 젊고 탄탄한 육체를 갖고 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뇌졸중에 걸렸다면 자전거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자기 몸의 중심을 다스리는 신경의 작동이 원활해야만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중심잡기는 시각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눈을 가리고 자전거를 탄다면 어느 정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중심이동의 반응이 느리게 작용하기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중심잡기는 뇌의 신경이나 시각의 도움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두 발의 감각이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랫동안 꼬부린 자세로 앉아서 발에 쥐가 났을 때 일어서기도 힘들듯이 두 발의 감각이 예민하게 작용해야만 인간의 중심잡기가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생체학 전문가들이 볼 때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겠지만, 다른 것은 모두 접어두고 인간이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앞을 직시할 수 있는 이 능력이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인간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동의해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인간의 직립보행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을 가장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위대한 사건이다. 소위 "호모 에렉투스"(직립인)의 출현은 유인원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업그레이드" 되는 인간의 지구적, 더 나아가서 우주론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네 발로 땅을 기어다니다가 두 발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 세세한 줄거리야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지질학적 변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아프리카가 울창한 숲으로 되어 있는 서쪽과 평야로 되어 있는 동쪽으로 구분되면서 동쪽으로 떨어져 나온, 이미 꼬리가 없어질 정도로 진화된 유인원이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먹이를 쉽게 얻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앞의 두 발을 땅에서 떼어내고 일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가 2백만 년 전쯤이다. 어쨌든지 인류학자들은 이들을 가리켜 호모 에렉투스라고 일컫고 있는데, 이런 직립보행으로부터 인간의 모든 탁월한 능력이 주어졌다는 그들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두 발로 직립 한다는 것은 걸으면서도 두 손으로 무언가를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성이 두 배로 늘어났다는 의미이다. 직립의 삶은 몸의 구조상 뇌의 무게를 훨씬 편리하게 감당할 수 있게 했다. 결국 다른 동물보다 큰 뇌를 소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직립은 성대를 발달시켰다. 다른 동물에 비해서 인간은 훨씬 다양한 소리를 구사함으로써 결국 언어의 발달을 가져왔다. 손, 사유, 언어라는 인간적 특징의 단초가 바로 직립 보행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지금 우리 몸의 중심잡기 운동이 지구 역사를 바꾸어놓은 혁명적 사건이라는 점도 인정할 것이다.

아기를 낳고 키워본 사람들은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대충 생후 열 달 정도가 되면 조금씩 서기 시작한다. 의자나 사람을 붙들고 서다가 차츰 그런 의지대가 없어도 2,3초 정도 혼자 서게 된다. 그 때의 중심잡기는 아직 완성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단지 잠시 동안 두 발을 뻗치고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막대기를 세워놓아도 그런 정도는 서 있다. 그래도 그게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경험인가? 아이들은 아빠의 손위에서 잠시 서 있다가 주저앉으면서도 까르르 웃는다. 그런 학습이 반복되면서 다리 근육에 힘도 붙고 자기 아빠에 대한 신뢰심도 증가하면서 이제는 겁 없이 아빠의 손위에서 계속 힘을 주고 있게 된다. 그러다가 첫돌을 전후해서 혼자 걷게 된다. 이제부터 이 아이에게 세상은 다르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기어다니다가 걷는 아이의 눈에 이 세상의 사물의 실체가 바르게 들어오게 된다.

사지를 가진 동물 중에서 인간 이외에도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유가 몇몇 있긴 하다. 예컨대 침팬지를 오랫동안 훈련시키면 자전거도 타고 인형을 업고 걸어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침팬지에게서 일어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직립을 알고 있는 인간이 자기의 의지를 침팬지에게 쏟아놓은 결과에 불과하다. 침팬지 스스로 직립에 대한 인식이나 의지가 작용한 게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의지가 작용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첫돌을 맞는 아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직립을 향해서 몸부림친다. 흡사 2백만 년 전 유인원이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쳤듯이 말이다. 고고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 언급해야만 할 이런 문제를 내가 더 이상 언급한다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그만 줄이는 게 좋겠다.

어쨌든지 인간의 중심잡기가 엄청난 사건인데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사실 앞에서 내가 좀 "오버" 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자전거를 타며 느끼는 그 중심잡기의 절묘한 감각을 지난 2백만 년 전 우리의 유인원이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터득하게 된 직립보행의 경험과 연결해서 자랑스럽게, 황홀하게 여길 것이다. 자전거 타기의 멋진 그림 한편으로 소개하겠다. "시티 오브 엔젤스"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가? 여의사 메기로 분한 맥 라이언이 숲속 언덕길에서 두 손을 모두 핸들에서 놓은 채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환희에 찬 표정으로 달려 내려오는 그 멋진 모습도 역시 내 자전거 타기의 한 즐거움으로 자리잡고 있다.  <2003년 5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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