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지식인과 운동가들에게

어제(6월12일) 나는 목요일 밤마다 손석희 아나운서에 의해서 진행되는 <100분 토론>을 시청했다. 노무현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에서 두 사람이 출연했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민주당의 김근태 의원과 외대 이장희 교수가 출연했다. 결론적으로 김근태 의원과 이장희 교수의 논리는 상당히 감정적이거나 자기 합리화에 기울어져 있어서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김근태 의원이나 이장희 교수 모두 자신의 삶을 던져 이 시대의 왜곡된 현실을 잡아보려고 애를 쓴 분들이기 때문에 평소에 존경의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노무현 정권을 보는 시각이 상당히 비틀어져 있는 것 같아서, 혹은 어떤 정치적 고려나 이념적 틀에 같여 있는 것 같아서 역시 인간의 인식과 판단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줄곧 노 정권의 외교가 굴욕적이라는 점을 부각시켜보려고 했다. 한미동맹보다는 민족 자주가 우선이라는 아주 이상적인 주장을 펼쳤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서 최소한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치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외교는 그런 원칙을 곧이 곧대로 밀고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다. 북한의 외줄타기 외교라든가,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이 보여주는 선악이원론적 정책 사이에서 우리 남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별로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더구나 남한 안에서도 훨씬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는 보수 우익 집단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다. 김근태 의원은 김구 선생을 거론하면서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어제의 토론을 마감했다. 이장희 교수는 별로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은 6.15 남북정상 회담의 의미를 다시 살려야 하며, 이를 위해서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끝말을 맺었다. 특검의 진행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견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일단 정리를 하는 게 민족사적인 차원에서도 훨씬 득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이장희 교수는 이 문제를 매우 격한 어조로 비판만 했다. 이에 반해 정부 쪽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이름이 기억나지 않음) 일단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이 아주 명쾌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욕심을 갖지 않겠다는, 그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좌우간 이런 논란 가운데서 우리가 중심을 두어야 할 핵심은 어떻게 해서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제 형세를 조율해나가는 것이지 좌충우돌 하고 있는 부시 앞에 가서 큰 소리 한번 치는 것은 아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전교조와 교총과 교육부, 학부모회 등등, 많은 교육단체과 기관들에 의해서  NEIS 문제가 거의 사회 분열을 일으킬 정도로 비화되었다. 윤 장관의 줏대 없는 언행으로 말미암아 공연히 부풀어진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이 문제가 이렇게 까지 시끄러운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미숙한가 하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런 사회 문제에 적지 않게 관심을 갖고 있는 나도 나이스(네이스?)가 무엇인지 자세하게는 잘 모른다. 인권위에서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판결한 것을 보면, 아마 학생들의 신상이 손쉽게 누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관계된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공청회를 열고 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모아가면 된다. 이 모든 게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자는 것이 아닌가? 이런 최소한의 생각이 통하기만 한다면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자기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너무나 손쉽게 연가를 내는 방식으로 투쟁하고, 가르치는 행위를 포기한다거나 시위에 들어가는 것은 교육자로서 신중하지 못한 태도이다. 정말 사생결단으로 뛰어들어야 할 문제인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대화하고 설득하고 중지를 모아나가야 할 문제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무조건 자기 주장만 관철시켜 나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새만금 문제는 나로서도 언급하기가 참으로 난감하다. 일단 방조제 공사를 중지하고 좋은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일 텐데, 전북 도민이 저렇게 아우성 치듯 매달리고 있으니 정부 쪽에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국회의원들도 지난 번 두 성직자의 "삼보일배" 이후에 반짝하더니 이제는 소수만 방조제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제는 흡사 대구 사람들이 무슨무슨 국가 공단 지정을 위해서 지역감정을 이용하면서까지 매달리듯이 전북도민의 생활과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에 환경단체들은 노무현 정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말고 전북 도민의 마음을 돌려놓는 일을 우선적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만약 전북 도민들이 새만금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정부쪽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진행시킬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이미 공사가 상당히 많이 진척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호남 소외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 마당에 방조제 공사를 중지시키라고 노 정권을 밀어붙인다면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접근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사안들 말고도 노조 문제도 있긴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니까 접어두로 하고, 이들 진보적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겠다. 거의 가능성이 없었던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정치와 경제, 문화, 교육 전반에 걸친 지형의 변화를 예고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는 허탈감 때문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실망하면서 비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믿고, 기대했으면 최소한 2,3년은, 아니면 1년만이라도 기다려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중간이라도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비판하고 투쟁해야 하겠지만 전술상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은, 문제가 없어도 씹고 싶은 사람은, 공연히 보기만 해도 밉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중에는 원래 보수 반동(反動)이던 사람도 있고, 같은 길을 가다가 "이웃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식으로 시기하는 사람도 있고, 늘 비판을 위한 비판에 젖어 있는 사이비 지식인들도 많다. 이런 와중에 건강한 지식인 운동가들마저 열매를 빨리 얻고 싶은 다급한 심정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내비치면 일하는 사람은 피곤하다. 전교조 선생님들도 조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지금 문제는 네이스를 끌어내리는가 아닌가 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비교육적 현실에 있다. 고등학생들을 밤늦게까지 학교에 잡아매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좀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네이스 문제로 노 정권의 힘을 약화시켜 버리면 이 사회에 내면화된 구조적인 문제는 손을 댈 수도 없다. 자칭 진보적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 민주당 의원들 중에서 노무현 정권의 정책을 시시콜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방문에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느니, 일문방문이 굴욕적이었다느니, 또는 특검이 잘못되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그렇지 않아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과의 버거운 싸움을 전개해야 할 노 정권의 힘을 소진시켜 버릴 것이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과 그 정책 브레인들이 정책적 판단을 잘못 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주마가편이라고, 노무현 정권을 위해서 진정어린 충고는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의 행태는 나름대로의 자기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나친 선명경쟁에 휩싸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으로 투쟁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면 좀 기다립시다. 우리가 선택한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까지 잘 달리도록. 그래서 좋은 기록을 내도록. 동지들이여! (정용섭, 200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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