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



잠자리 떼의 출현

내 서재가 들어앉은 대구성서 아카데미가 대구와 영천을 잇는 대로변에 붙어있긴 하지만 건물 뒤편으로는 앞으로 공원이 들어설 자리에 묘목밭이 있어서 그쪽으로 눈을 돌릴 때마다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며칠 전 서재에 앉아서 문득 창문을 통해서 바깥을 내다보다가 다시 한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장마 중에 잠시 맑은 날을 틈 타 몰려든 잠자리 떼였다. 푸른 하늘에 드믄드믄 뭉게구름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였고, 멀리는 하양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환성산의 자태가 자못 매혹적으로 보이는 그 시간에 물경 3,4천 평쯤 되어 보이는 묘목밭 한쪽 켠에서 갑자기 잠자리 떼의 군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사실 어릴 때 많이 보았다. 여름 방학 내도록 개울이나 웅덩이에서 고기를 잡거나 수영을 하며 지내던 그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수십, 수백의 잠자리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경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말잠자리는 아주 컸다. 암놈 말잠자리를 한 마리 잡으면 그걸 미끼로 해서 숫말잠자리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 암놈을 실로 묶어 돌리면 수놈이 와서 붙기 때문에 간단히 잡을 수 있었다. 그때 그 말잠자리를 잡은 이유가 무엇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메뚜기는 그 자리에서 구워먹거나 집으로 가져가면 저녁 반찬거리라도 되지만, 잠자리는 먹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잡았다. 아마 그게 우리 어린이들의 놀이였던 것 같다.

기왕에 잠자리 놀이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약간 잔인한 놀이 한 가지를 고백해야겠다. 우리는 잠자리를 잡아서 꽁무니에 적당한 크기의 나무 가지나 지푸라기 같은 것을 쑤셔 넣고 날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면 자기 몸에 난 상처도 상처지만 그 무게로 인해서 그 잠자리는 허우적거리면 겨우 날아갔다. 그 어떤 곤충보다 탁월한 비상 기술을 갖고 있던 잠자리의 비틀대는 비상을 보고 우리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풍뎅이의 날개를 어긋나게 비틀어놓으면 그 놈들이 도망하려고 아무리 날갯짓을 심하게 해도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정말 심심해서 그런 잔인한 행동까지 놀이로 생각했다. 집안에 들어가 봐야 덥기만 하고 공부하라는 어머니 잔소리만 들었기 때문에 몰래 빠져나와 친구들과 그렇게 시간을 때웠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그런 잔인한 성품을 갖고 태어나는지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설명될 수 있긴 하지만, 그런 놀이보다 훨씬 창조적인 일에 재미를 붙여야만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이다.  



고추잠자리의 무도회

좀 나이가 들어서도 잠자리의 군무는 내 기억에 깊은 인상을 심어놓곤 했다. 지금도 이런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아마 81년 여름 8사단 모 연대에서 군목으로 일할 때인 것 같다. 내가 근무하던 연대 교회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던 전형적인 시골교회당으로서, 흰색 벽에 붉은 지붕의 건물이었다. 연대의 통신보안 명칭인 "불멸"을 따서 불멸교회라고 불린 이 교회에서 81년 8월부터 82년 7월말까지 근무했다. 81년 초가을 어느 날 나는 교회당 뒤편 언덕에 앉아서 책을 보기도 하고, 간혹 그 아래쪽 꾸불꾸불한 비포장 도로를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오가는 여객버스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추잠자리 떼가 확 내 눈에 들어왔다. 원래부터 그렇게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몰려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순간에 눈에 띄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관심사에만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태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쨌든지 오랜만에 보는 그런 장면을 놓치지 않고 옆에서 바라보다가 아예 잔디 위에 누워서 보기로 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광경은 또 달랐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간 고추잠자리들의 비상은 너무나 찬란한 생명의 무도회였다.

그런 어릴 때, 또는 젊었을 때의 기억이 있는 터라 이번에도 묘목밭 위에서 군무를 펼치고 있는 잠자리 떼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놈들의 날갯짓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곤충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 정확하게 알 수 있기는 하겠지만, 날갯짓 없이 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내 눈에는 그 놈들이 날개를 쫙 핀 채로 그냐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것 같이 보였다. 아마 그놈들의 날개가 너무 투명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날갯짓이 너무나 빠른 탓일 수도 있으리라.



비상의 자유

아, 잠자리의 날개! 모기나 파리의 날개도 신기하긴 하겠지만 잠자리의 날개를 따라가진 못한다. 어릴 때 만져보았던 잠자리의 날개는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로웠다. 나비의 날개는 너무 흐느적거리기 때문에 별로 상쾌한 기분을 주지는 못했으며, 또한 메뚜기 날개는 너무 거칠었다. 반면에 잠자리 날개의 질감은 나비의 부드러움과 메뚜기의 거칠음을 적당하게 배합시킨 느낌을 주었다. 그런 부드러움과 거침이 조화된 날개로 인해서 잠자리는 곤충으로서 가장 뛰어난 비상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아마 나비와 메뚜기의 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잠자리의 비상이 얼마나 고고하고 완벽한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비의 나는 모습은 흡사 월츠를 추듯이 우아하기는 하지만 보는 이의 숨을 가쁘게 만든다. 메뚜기는 나는 게 아니라 뛴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그 서툰 날갯짓을 통해서 뛰는 거리를 대폭 늘릴 수는 있지만 날갯짓이 퇴화된 닭처럼 자기 몸무게를 감당할 만큼의 부력이 없다. 그러나 지구의 중력을 거의 극복한 듯한 잠자리의 비상은 그들과 전혀 품격을 달리한다. 내 눈에 비친 잠자리의 비상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잠자리는 공간을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떠다닌다고 보는 게 옳다. 흡사 어항 속의 물고기가 인간이 하듯이 억지로 노력해서 헤엄을 치는 게 아니라 그냥 물과 하나가 되어 물 속에 떠있는 것과 같다. 잠자리의 비상을 보면 공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것 같다.

둘째, 잠자리의 순간 이동은 그 어떤 곤충이 따라올 수 없다. 빠른 종류의 잠자리는 시속 100km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까닭인지는 몰라도 잠자리의 비상은 거의 직선 운동에 가깝게 보인다. 아마 어렸을 때 담장이나 나뭇가지 끝에 앉아있는 잠자리를 손으로 잡아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잠자리가 순간적으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 곤충인지 실감했을 것이다. 물론 머리 전체가 거의 겹눈으로 둘러싸여서 전후좌우 어떤 방향이든지 대상을 완벽하게 식별해낼 수 있는 시각 탓이기도 하지만 빠른 공간 이동 능력이 그것을 받쳐내기 때문에 자기 보호가 가능하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잠자리의 비상을 완전한 자유라고 부르고 싶다. 모든 날것들은 아무리 특별한 재주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길이 정해져 있다. 예컨대 갈매기나 독수리나 제비의 비상이 아무리 화려해도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거의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잠자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기 덩치에 비해서 워낙 빠른데다가 다른 날것들에게 불가능한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잠자리의 비행 노선을 예상할 수 없다. 아마 파리나 모기도 이런 점에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겠지만 일단 그 품위에서 잠자리보다는 한 수 아래다.

만약 우리가 잠자리의 자유로운 비상을 따라가고 싶다면 위에서 두 가지 특징을 언급한 것처럼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지구의 중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자기 몸을 가볍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대개 우리의 삶은 날개가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평생 자기 덩치를 키우는 데만 신경을 쏟고 사는 사람은 결코 비상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을 정도의 날갯짓 기술이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조건들을 부담으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살아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말이다. 잠자리는 저절로 그것을 아는데, 나는 언제가 그것을 몸으로 깨닫고 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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