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빛, 벼


오늘은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도록 빛난다. 이 눈부심은 온 천지가 눈에 덮인 겨울 어느 날의 화려함이 아니며, 그렇다고 복사꽃의 화사함이 가져다주는 어느 봄날의 황홀한 나른함도 아니고, 파도의 흥겨움과 백사장의 뜨거움이 가져다주는 여름 어느 날의 열정도 아니다. 이 가을의 눈부심은 순결미도 아니고 청순미도 아니며, 관능미도 아니다. 가을의 햇살만이 갖고 있는 이 눈부심은 그 모든 것을 합쳐놓은 아름다움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완숙미라는 게 말이 될까? 이 가을은 생명이 완성되는 절기이니까 그런 아름다움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또는 나그네가 주막집에 들어가듯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시기이니까 한편으로는 분주한 것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쉬움과 편안함이 더불어 있는 시간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상념이나 감상에 젖을 나이를 훨씬 넘긴 나에게 이 가을 햇살이 왜 이토록 눈부시게 다가오는 것일까?

어쩌면 심리적인 착각이 작용하는지 모르겠다. 실제로는 다른 계절에 비해 자극적이지 않는 햇빛이지만 지난 여름의 더위, 장마, 태풍으로 인해서 우리의 감각이 무뎌져 있다가 이 가을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자연의 모습에 물씬 빠져드는 것 같다. 분명히 가을 햇살은 나무와 풀, 꽃의 색깔을 화려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시각이 번뜩 정신을 차리게 해준다. 이 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같다. 흡사 카드 섹션이 일어나듯이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그리고 산꼭대기서부터 산 아래로 차례대로 옷을 갈아입는 그 자태라니! 우리의 무뎌졌던 감각이 다시 살아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눈이 부실 수밖에!

이런 감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가장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이 가을 햇살은 나를 눈부시게 하고, 더 나아가 순간적으로나마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오늘 점심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면서 이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적당한 바람, 하양천 변에 피어있는 꽃, 환성산의 푸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하늘의 구름 등등,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내가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그것 이상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별로 없었다. 연구소 앞마당에 자전거를 세워놓다가 문득 바로 옆의 공터에 널려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태양 빛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벼였다. 요즘은 벼 건조도 대개는 기계로 처리하는 데 부분적으로는 이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보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어떤 언어로도 마땅히 그려낼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가을, 햇빛, 벼가 내 감각과 의식 속에서 오버랩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게 일종의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저기 저렇게 널려있는 벼는 원천적으로 태양 에너지의 결집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식물의 탄소동화 작용은 빛과 탄소와 물이 물리적, 화학적 상호 작용을 통해서 일어난다. 여기서 어떤 요소가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모든 요소가 각기 나름대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이 지구의 대기에 탄소 양이 줄어든다면 이런 탄소동화 작용이 원활하지 않게 되거나 심지어는 아예 멈추게 될 것이다. 물론 물은 모든 생명의 가장 중심적인 구성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이 탄소와 물이라는 지구의 물질이 식물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해를 바라볼 때 단지 세상을 밝혀준다는 관점만 생각하지 실제로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현상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햇빛의 양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거나 하면 이 지구의 생태계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모든 식물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멸종하게 될 것이며, 식물이 사라지면 그것을 먹거리로 삼는 동물들이 죽게 되고, 그 뒤로는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벼는 해 에너지의 결집체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 인간도 해 에너지를 먹고사는 존재라고 해도 좋다. 해 에너지가 우리의 몸을 살리고 있다. 탄소동화 작용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은 가능하지만 과연 해 에너지가 우리 인간의 몸에 담긴다는 그 긴 과정을 명확하게 해명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직관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뿐이지 그래야만 할 당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사실 생명 현상 자체가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사건이기 때문에 해 에너지와 인간의 관계를 완전하게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문제는 아마 종말에 가서야 드러나지 않겠는가. 어쨌든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지금 우리는 해의 자식들임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해를 통해서만 생명을 유지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해를 일종의 신성으로 숭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의 모든 종교는 이 해와 연결되어 있다. 이집트나 잉카문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직접적으로 해를 섬기는 종교도 많지만 간접적으로는 모든 종교는 해와 연관을 맺고 있다. 기독교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를 빛이라는 메타포로 표현한다. 교회의 절기도 상당한 경우에 이 해와 연결된다. 우선 기독교가 거룩한 날로 생각하는 주일이 바로 로마에서 해의 날로 섬기는 날이며, 성탄절도 역시 해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다고 믿었던 12월25일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사건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빛이라는 사실도 역시 이런 구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해는 지구에서 거의 1억5천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면서 지구를 비롯해서 수성, 금성, 목성으로부터 시작해서 명왕성까지 떠돌이별 아홉 식구를 거느리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식구들이 발견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아홉 별이다. 빛이 해에서 지구까지 오는데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대략 8분 정도 걸린다. 그렇다면 명왕성까지는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대 여섯 시간 이상 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마 명왕성에서 해를 보면 주먹보다 더 크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빛이 가 닿기도 힘든 그 거리의 명왕성을 끌어당기고 있는 해의 중력은 도대체 얼마나 막강한 것일까?

해에서 분출되는 빛 에너지는 거의 무한에 가깝다. 주로 헬륨 가스가 연소되면서 만들어지는 이 빛이 내는 에너지 중에서 지구가 받아내는 것은 거의 수치로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미미하다. 예를 들어 10만 명이 들어가는 축구장 한 복판에 고성능 난로를 설치했다고 하자. 스탠드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받는 열량은 전체 열량의 몇 퍼센트가 될까? 평면으로만 계산해도 십만 분의 일인데다가 공중과 지면으로 흩어지는 열량까지 계산하면 어느 정도일는지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지구가 해로부터 받아들이는 빛 에너지는 이런 관계보다 훨씬 적다. 1억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요즘 생태학자들의 염려가 많은데, 만약 앞으로 거의 무한에 가까운 이 해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기만 하면 에너지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그런 기술이 발전되기 전에 기술 자체가 생태계를 파괴해버릴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시라. 그렇게 적은 햇빛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 지구에 이처럼 놀라운 생명 현상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그 기적의 한 순간을 나는 오늘 가을 햇살에 온몸을 드러낸 황금빛 벼에서 보았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라는 이야기집을 펴낸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생각도 이런 데 있는 게 아니었을까? 모든 예술, 문학, 과학, 종교, 그리고 모든 인간학적 담론들은 바로 이런 세계를 사유의 토대로 삼는다. 더욱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의 신묘불측(神妙不測) 앞에서 진정한 영성을 확보할 줄 알아야 한다. 로고스의 영성만이 아니라 몸의 영성이 바로 그것이다. 햇빛과 벼가 마지막 사랑을 불태우는 이 가을에 나는 사물 속에 긷든 에로티시즘을 다시 맛본다. 에로티시즘의 영성이라..., 말이 될까? <10월25일>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