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사무라이

Last Samurai



서양 사람들의 눈에 비친 동양은 한편으로는 야만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로울 것이다. 야만스럽다는 것은 자기들의 문명이나 문화에 비해 동양의 그것은 뒤떨어진다는 것이며, 신비롭다는 것은 자신들의 문명과 문화로 담아내지 못하는 정신 세계가 동양에 있다는 뜻이다. 서양 사람들이 만든 동양을 주제로 하는 영화도 역시 거의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별로 영화를 즐기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가 얼마나 생산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다만 월남전을 소재로 무수하게 나왔던 헐리우드 영화 몇 편에서 그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르긴 몰라도 인도, 중국,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역시 이런 범주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거의 4,5년만에 가족에게 끌려서 오늘(2004년 1월19일) 롯데 시네마 제6관에서 본 '라스트 사무라이'도 역시 이런 서양 사람들의 눈에 신비하게 보인 일본 무사도(武士道)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더 솔직하게는 좀더 돈벌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 사무라이의 세계를 미화시킨 부분이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간단히 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톰 크루즈가 분(扮)한 주인공 네이든 알그렌은 남북 전쟁과 인디안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현역 대위였다. 그는 1870년대에  막부정치 시대를 끝내고 일본의 개화를 위해서 우선 철도를 깔고 서양식 군대를 조직하려는 일본 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와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반기를 들고 있는 사무라이를 토벌해야 할 책임을 떠맡았다. 알그렌은 무고한 인디안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도하고 심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월급에 비해 거의 스무 배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에 매력을 느낀 아주 평범하고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사무라이 집단과 아직 싸울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직속 상관의 성급한 판단 때문에 섣부른 전쟁을 벌였다가 크게 당하고, 알그렌은 죽음 일보 앞에서 사무라이 대장인 카츠모토에 의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포로가 된다. 켄 와타나베가 분한 카츠모토는 바로 이 영화에서 마지막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인물로서 사무라이 세계에서는 주군(主君, Lord)이라고 불린다. 포로가 된 알그렌은 카츠모토의 배려로 별 어려움 없이 겨울 한 철을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는 도시와 격리된 채 자기들끼리 독특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 속에서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평화와 기쁨을 맛본다. 카츠모토와의 대화를 통해서 사무라이들이 어떤 생사(生死)관을 가졌는지, 그들의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접하게 된다. 사무라이 마을에 축제가 벌어진 날, 일단의 자객들이 들이닥쳐 한 바탕 싸움이 벌어지는데 여기서 알그렌이 카츠모토를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 이후에 카츠모토와 알그렌 사이에 깊은 신뢰가 쌓인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황제의 호출을 받아 동경(?)에 간 카츠모토는 개화파 대신의 계략에 빠져 구금된다. 카츠모토와 함께 동경으로 돌아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던 알그렌이 이 소식을 접하고 몇 사람들과 힘을 합해 카츠모토를 구출한 후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간다. 천황이 있었지만 실제적인 힘을 손아귀에 쥔 개화파 대신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제국 군대는 미국에서 들여온 곡사포 및 기관총 같은 어마어마한 화력을 앞에서 사무라이 마을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결국 이 전쟁에서 모든 사무라이는 죽는다. 그 위대했던 카츠모토도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 토벌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 개화파 대신은 황제를 설득해서 미국과 정식으로 조약을 맺으려고 한다. 물론 이 조약이 체결되면 이 대신의 개인 사업은 훨씬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 순간 알그렌이 나타나 황제에게 카츠모토의 칼을 건네면서 그의 충성을 다시 확인시킨다. 개화파 대신에게 발목이 잡혀 고분고분했던 나이 어린 천황은 이 칼을 보고 다시 일본 정신을 회복한 다음, 미국과의 조약을 거부한다. 황제는 일본이 하나가 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무라이 쪽을 멀리 했지만 원래 수백 년 동안 황실을 지켜왔던 사무라이의 충성심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결단을 한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발전도 좋지만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어디를 보아도 그렇게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우선 독창성에서 밀린다. 위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의 흐름이 이미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늑대와의 춤을'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늑대와의 춤을'에서 주인공은 인디안들에게서 훨씬 강한 인간미와 평화 지향성을 발견하고 자기의 뿌리인 백인들과 싸우는데, 그런 흐름을 '라스트 사무라이'가 베낀 것 같다. 이런 큰 흐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작은 부분에서도 역시 베낀 흔적은 적지 않다. 아마 마지막 인디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제법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영화에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논리가 그렇게 명백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한 개인의 죽음과 삶의 문제를 훨씬 거대한 운명의 힘에 맡기는 사무라이들이지만 매제를 죽인 미국 사람을 그대로 용납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참모들의 주장 앞에서 적을 알아야 적들과 싸울 수 있다는 카츠모토의 논리가 충분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상당히 양적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쟁 장면에서 리얼리티가 좀 떨어진다. 이 영화에서 전쟁은 두 번 벌어지는데, 두 번째 장면이 너무 상투적인 방식이었다. 이런 전쟁 영화가 늘 그렇듯이 큰 전쟁터에 양 진영이 집결해 있고, 서로 밀려들면서 전투가 벌어진다. 그리고 부분 전투를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서 전쟁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런 정도의 장면은 영화 후진국에서도 얼마든지 생산해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안개 전투로 일컬어지는 첫 장면은 전쟁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긴장감의 밀도가 강했다.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트집잡는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영화가 다른 장면에 비해서 전쟁 장면에서 그 완성도가 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별 볼일 없는, 그렇고 그런 영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더구나 그 영화관 관객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본 영화가 걸작이 아니라서, 사실 그런 야무진 꿈을 갖고 하양에서 대구까지 먼길을 간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 영화에서 인상 깊게 남아있는 내용이 있기에 이렇게 영화 뒷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그것은 두 대목이다.

하나는 다음과 같다. 알그렌은 포로로 잡혀 겨울 한철 사무라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칼쓰기를 배운다. 전쟁 영웅으로서 싸움이라면 일가견이 있던 그였지만 사무라이 검객들과의 칼쓰기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카츠모토의 아들이 이렇게 그에게 충고했다.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마음을 비우라." 칼쓰기를 할 때는 오직 상대방과 칼만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한다. 여기서 내 설명이 더 이상 필요 없다. 무엇이든지 도(道)에 이르려면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만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인식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고, 더구나 그것을 체화 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하나로 집중하는 것' 쉽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 많은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내면이 혼란스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부(쿵후)라는 것은 자기를 비워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를 비워내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적 어른들은 침묵수행을 한다거나 좋은 글을 소리내어 읽었다.

다른 한 대목은 알그렌과 카츠모토 사이에 나누었던 대화에 들어 있다. 이 두 사람은 전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내면적으로 공감되는 경험을 갖고 있었다. 죽음과 두려움이 그것이다. 그런데 알그렌은 일본에 오기 전에 자기 삶을 포기한 것처럼 살았고 일본에 와서도 잠을 자다가 헛소리를 하는 일이 많을 정도로 불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훨씬 죽임과 죽음에 가까이 있던 카츠모토는 여전히 평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카츠모토의 말이다. "벚꽃처럼 모두가 죽어. 그러나 모든 건 존재의미가 있지. 그걸 아는 게 무사도야." 사무라이는 죽이는 자나 죽는 자나 결국 잠깐 피다가 떨어지는 꽃잎처럼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서로 적으로 만나서 죽고 죽이기는 하지만 모든 생명이 존재론적으로 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카츠모토가 자기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시를 쓰다가 끝내지 못한 마지막 연이 의미심장한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영화를 보다가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다. 다만 벚꽃 한 송이도 완벽한 하나의 생명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만 할뿐이다. 어쨌든지 알그렌이나 카츠모토나 똑같이 전문적으로 사람 죽이는 일을 그것에 대한 태도와 결과는 달랐다. 한쪽은 돈을 목적으로 했다면, 다른 한쪽은 존재론적인 운명에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들의 삶이 외면적으로는 비슷한 행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적으로 크게 달랐다. 한쪽은 그 행위의 동기와 결과가 미움과 증오였다면, 다른 한쪽은 존재와 사랑이었다. (도대체 목숨을 건 싸움에서 사랑이 말이 되는가, 하고 따질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가능한 세계가 바로 사무라이의 도, 즉 무사도이다.). 이런 존재와 사랑이 그 뿌리를 잡고 있던 사무라이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밀려오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삶을 '섬김'에서, 즉 시(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알그렌이 한 겨울을 함께 지내면서 경험한 사무라이 마을의 그 역동성은 곧 그들이 시를 삶의 구성 요소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이런 내용을 잡아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화관의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운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때로는 그것이 뉴질랜드에서 촬영되었다고 하지만, 6천5백원의 가치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개화기의 일본 풍경을 맛보는 것도 이 영화 감상의 한 재미이다. 특히 카츠모토의 여동생으로서 자기 남편을 죽인,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포로로 잡혀온 알그렌을 한편으로는 적개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무라이 정신인 시(侍)의 마음으로 극진히 보살피다가 조금씩 사랑의 향기에 휩싸이게 된 고유키(타카 역)라는 여배우의 연기도 빼어났다. 말은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눈빛과 표정, 그리고 절제된 행동만으로 깊은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게 바로 연기력의 내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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