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노동당의 국회 진출



지난 4월15일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지역의원 2명, 비례의원 8명, 합계 10명의 의원을 탄생시킴으로써 열린 우리당과 한나라당에 이어 제3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확인해보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이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맥이 끊어진 이후 40 여 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 남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편향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런 사태는 우리의 정서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라는 부분도 작용했겠지만, 북한과의 분단상황이라는 부분이 훨씬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지난날 우리에게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거의 마녀의 저주처럼 작용함으로써 진보정당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한치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북한이 아무리 우리의 동일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상처가 큰 전쟁을 했고, 그 이후 계속해서 적대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북한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 일부의 마음을 이해할 만하다. 특히 해방 이후 모든 사회 부분에서 안정된 체제를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생존의 위기를 헤쳐왔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줄만한 여력을 보일 수 없었다. 이는 흡사 가나안 정복운동에 나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 원주민들을 말살하는 데 일말의 사정도 허락하지 않은 상황과 비슷하다. 남녀노소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까지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우리가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생존 투쟁에서는 윤리가 개입할 틈이 없다는 점을 거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런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니고, 단지 인류가 걸어온 길을, 아니 지금도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정치가들이 분단체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함으로써 이런 사태를 고착화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역사를 왜곡시켰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군사 독재자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사용했는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민심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조짐을 보이면 없는 간첩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위기 의식을 심어주고, 그런 와중에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진지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한 인혁당 사건이 그 단적이 예이다. 전두환 일당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항쟁을 간첩들의 사주를 받는 폭동으로 매도한 것도 역시 그렇다. 그 이외에도 자칭 보수 정치인이라는 정 아무개, 김 아무개 같은 의원이나, 월간조선 편집장 조 아무개 같은 사람들은 툭하면 '색깔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일이 과거 군사독재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국가적 불행이다. 월간조선의 조 편집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헌재에서 가결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를 북한과 연계시키고 있다. 북한의 이념에 기울어진 사람을 남한의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런 논리를 대명천지의 오늘 우리가 듣고 살아간다.

이념의 자유는 인간의 천부적 권리이지만 분단체제라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아직 공산주의 자체를 합법화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개인의 정치적 욕망 때문에 없는 간첩을 만들어 내거나 노동과 평등이라는 말만해도 색깔 공격을 가하는 행태야말로 그들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부르짖는 애국을 좀먹는 일이다. 우선 이런 선동에 의해서 사람들의 판단이 흐려진다는 점이 그 이유의 하나이다. 이번 총선에서 하나라당 의원들이 싹쓸이 한 대구 경북 사람들 중에는 민주노동당은 물론이고 열린우리당도 빨간물이 상당히 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어떤 분은 북한과 미국을 같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용납할 수 없다고 열을 올린다. 색깔논쟁을 부추기는 정치인들과 그것에 부화뇌동하는 유권자 사이에 한쪽에는 정치권력이라는 먹이로, 다른 한쪽에는 정신적 만족감이라는 먹이로 일종의 공생관계가 형성됨으로써 반공 이데올로기가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가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 사회에 강고한 틀로 자리를 잡고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파생하는 훨씬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는 민족적인 차원에 있다. 1990년 어간에 현실 사회주의가 해체된 이후 등장하게 된 폐쇄적 민족주의가 우리 인류의 미래는 아니지만 역사의 중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것을 일단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런 민족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당위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당장 김정일 주석이 남한을 통째로 공산화할지도 모른다는 공연한, 또는 비장한 공포감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한 남한과 북한이 민족의 문제를 미래 지향적으로 풀어가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다. 예컨대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우리의 숙제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남한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은 전제되는 일이다. 노 대통령이 제시했듯이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몽고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권의 핵심 국가로 자리 매김하려면 우리는 북한을 개방으로 끌어내야 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미 개성 공단에 입주할 남한 기업들이 선정되는 과정에 있지만, 이런 경제 교류가 훨씬 왕성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 쌀이나 비료를 보내고, 가능하다면 우리의 힘이 닿는 만큼 전기도 보내야 한다.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인권 문제를 들먹이고, 핵 문제를 미국과 공조해서 지나치게 시비를 걸고, 더구나 그들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면 남북한은 적대감만 쌓일 뿐이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것이다.

역사는 점진적인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이번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은 우리의 역사를 그렇게 바꿔놓기에 매우 중요한 계기이다. 이제 더 이상 현 정부를 좌파 정권이라고 비판하는 일이 무색해졌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보수 정치집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을 앞에 두고 색깔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보기에도 노 대통령의 생각은 좌파라기보다는 진보적 현실주의이며, 열린우리당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약간 개혁적일 뿐이다. 그나마 이런 분들은 이렇게 숨통이 막히는 우리 남한의 역사에서 매우 필요한 작업을 해낼 것으로 보고 기대를 걸어둘 만 한다.

오늘 이 시점에서 민주노동당의 역할은 그 정당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열린우리당과의 협력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민주노동당의 진보와 열린우리당의 개혁이 우리나라를 새롭게 견인해낼 만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라크 파병 문제만 하더라도 국가의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차원에서 노 정권이 파병을 선택하는 국면에서 진보 정당인 민노동이 강하게 태클을 걸게 되면 노 정권의 운신의 폭은 그만큼 넓어진다. 노동문제도 역시 노동자를 정파적으로 지원하는 민노당의 입김은 곧 노 정권이 훨씬 유연하게 기업가를 상대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민노당이 자신의 정치 철학에 얼마나 투철하면서도 동시에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역량을 보이는가 하는 점이다. 국회에 진출하기 전에는 무조건 원칙과 구호로도 통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원칙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까지 생각해야하는 자리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즉 '부유세'를 신설해서 복지에 투자하겠다는 민노당의 정책이 어떤 현실성과 효율성이 있을 지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지 이번 민노당의 국회진출로 인해서 우리의 정치적 역량이 훨씬 넓어지는 계기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좌에서 중도를 거쳐 우까지, 여러 이념의 정당들이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대가 주어진 셈이다. 공연한 색깔논쟁에서 벗어난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다. 모쪼록 민노당에게 주어진 이 기회가 우연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필연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앞으로 확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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