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보안법

지난 7월24일 밤 ‘국가 보안법’(이하 ‘보안법’)을 다루는 토론회가 KBS 제2 채널에서 방송되었다. 아마 며칠 전 송두율 교수가 고등법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기도 했고 여당을 중심으로 보안법 철폐 논의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다룬 것 같다. 폐기하자는 쪽의 패널로는 열린우리당의 여성 국회의원과 민노당의 노회찬 의원과 변호사 한 분이, 그리고 폐기 반대쪽의 패널로는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재향군인회에서 나온 대표와 변호사 한 분이었다.
각각의 주장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뻔한 것들이었다. 특히 보안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쪽의 주장은 너무나 궁색했다. 한나라당에서 나온 국회의원은 지난날 수구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리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지만 다만 무늬만 그렇지 실제로는 완고한 입장을 보였다. 보안법 폐기는 안 되지만 개정은 할 수 있다면서 여당이 먼저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열린우리당 의원이 보안법을 일단 폐기하고 분단국이라는 현실을 감안해서 두 가지 항목을 형법에 넣자는 의견을 제시하자 한 마디로 ‘안 된다’였다. 나는 여기서 이념적인 문제에 관해 한나라당이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난날처럼 드러내놓고 반인권적 입장을 보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상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진보적인 입장을 보일 수도 없는, 몹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란을 여기서 되풀이하지 않고, 전체적인 맥락만 짚는 게 좋은 듯 하다.
보안법 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분명했다. 북한은 반국가 단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체제를 선전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할 수 없다는 게 요점이었다. 여기서 나는 북한의 비정상적인 국가 운영에 관한 문제를 조목 별로 열거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들의 체제가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생존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작용하게 될 국가 간 경쟁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그 실효성을 상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한나라당과 재향군인회 등등, 보안법을 유지하려는 집단이 북한을 불량국가로 보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보안법 같은 비정상적인 규정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보도록 하자.
보안법이 유지되어야 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명시적으로는 북한의 도발에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지난 우리의 현대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실제로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 독재자들의 정권 유지에 있었다. 정권 반대가 곧 친북 행위로 처벌된 사례를 우리는 무수하게 경험했지만, 이런 불행은 군사 독재 시절의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었다 치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런데 그런 시절에 입법된 보안법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인격이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왜곡된 게 아니라면 우리의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모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분단체제에서 그들이 예민하게 느끼는 불안을 내가 똑같이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문제를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분단체제의 실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는 게 이 문제를 풀어내는 단초가 될 것이다.
우선 이렇게 질문해보자. 북한이 남한의 체제를 붕괴시키거나 아니면 최소한 혼란을 야기할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의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6.25 전쟁에 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서 남북한 모두 초토화한 경험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나 상호간의 간첩 활동으로 인해서 서로 적대감이 상승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36년 간이나 식민통치한 일본과도 오래 전에 국교 정상화한 마당에, 북한은 아직까지 수교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북한을 상종 못할 집단으로 여긴다는 것은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요소가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레드 콤플렉스’가 바로 그것이다. 수십 년 간 북한과 공산당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집단으로 간주하는 교육과 사회체제를 유지하다보니까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함으로써 정상적인 판단을 훼손시켰다는 말이다.
북한을 불량 국가로 생각하는 미국과 우리 반공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위협이 우리가 통일을 이룸으로써 획득하게 될 그 미래의 희망에 비해 훨씬 미미하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내려야 할 판단의 중요한 잣대이다. 내가 군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북한은 남한을 적화 통일할 수 있을 만큼 자체적인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변 정세도 그들에게 전혀 유리하지 않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 전쟁 수행 능력에서 볼 때 남한에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변수이지만 남한의 물적 토대가 북한을 압도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북한이 재래식 무기로 단시간에 전쟁을 끝낼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지난 6.25 당시처럼 북한을 돕겠는가, 러시아가 그렇게 하겠는가? 현재 북한은 오히려 자신들의 생존에 급급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이 핵을 벼랑끝 전술로 삼아 생존을 담보해내려는 그 안간힘을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않은가?
내가 보기에 생존에 급급한 북한을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는 이유는 매우 불순하다. 미국의 군수업체가 자기네 대통령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듯이, 아니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듯이 우리 안에도 북한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집단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6.25 경험으로 인해서 정서적으로 불안을 느끼는 지난 세대는 접어두고, 이런 저런 정황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하거나 최소한 거기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말이다. 그런 분석이 아니면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뚫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왜곡시키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 문제가 우리에게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 요소는 북한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다. 미국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북한을 직접 공격하게 되는 경우에 북한은 ‘나 죽고 너 죽자’는 생각으로 남한 전역과 일본까지 미사일 공격을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는 날에는 남한과 일본의 핵발전소가 파괴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도 역시 독도 문제로 우리와 시비를 붙을 수 있고, 중국도 고구려 역사 문제로 인해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국가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그런 분쟁의 가능성에 불과한 북한과의 관계를 공연히 확대 재생산하지 말라는 뜻이다.
비록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현실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지금 당장 보안법을 폐기하기보다는 점진적으로 개정하면서 북한과는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모색해나가자는 주장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인 판단을 해야한다. 자연스럽게 해결될 때까지 우리가 역사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런 변화를 주도적으로 견인해나가야 할는지 판단해야 한다. 어떤 선택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좀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지 지금 우리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약간만 시각을 바꾸면 이 판단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잡한 이념적 갈등은 지나치게 과격한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약간의 변화마저도 과격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우리의 과거 역사가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야기되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남한을 병영(兵營)국가로 다루었던 군사독재 시절의 유산이다.
비록 북한의 변화가 너무 느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개의치 말고 통일 한국을 향해서 거침돌이 되었던 것들을 지뢰 제거하듯이 하나씩 제거해나가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보안법이라면 아무 두려움 없이 폐기하자. 거의 정권 유지의 수단에 불과했던, 그리고 이제는 실효성이 전혀 없는 보안법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가려는 것은 강을 건넌 나그네가 배를 등에 지고 길을 가려는 모습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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