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요즘 금융실명제가 주인 없는 미친개처럼 몰매를 맞고 있다. 며칠 전에는 전경련에서 공식적으로 금융실명제의 폐지를 요구했고, 대통령 후보들도 저마다 대폭 수정 내지 폐지를 주장했다. 자민련은 진작 부터 이를 못마땅해 했고, 자민련과의 연정을 시도하고 있는 국민회의는 자민련의 비위도 맞추고 김영삼 대통령의 실정도 부각시킬 겸 금융 실명제를 깎아내리고 있다. 이회창 후보나 이인제 후보도 거의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약간씩 표현만 달리했지만 까놓고 보면 거의 모두가 금융 실명제를 경제파탄의 주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금융실명제 때문에 돈이 마르고 공장이 돌지 않고 오히려 소비만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금융실명제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대통령의 통치수단이었다고 까지 말할 정도니까 그들의 불신이 얼마나 깊은지 알만 하다. 어쨌든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금융실명제는 온존할 수 없게 되었다. 채 몇 년 시행해 보다가 부작용이 많다고 해서 대폭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경제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턱없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상식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는 것이 훨씬 편안할 것 같다. 우선 내 경험에 의하면 금융실명제 때문에 받은 불이익이나 불편함은 거의 없었다. 주민등록증에 있는 그 이름으로 저금을 하고, 송금할 때도 실명 확인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물론 내가 가명으로 저금해야할 만큼의 돈이 없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명을 통한 금융활동은 건전하고 진보된 민주사회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경제윤리라고 생각한다. 이 제도가 실시되기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실명으로 은행을 드나드는 나를 보더라도 대개의 국민들에게는 금융실명제가 있든 없던 거의 상관없을 것 같다. 다만 실명으로 저금하기에는 뭔가 불편한 사람들은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금융 실명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된 이유는 이 제도의 실시로 인해서 음성자금이 양성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지하로 숨어들어갔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이 상당히 근거가 있을 수 있다. 자기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돈의 주인은 비록 이자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돈을 금융기관에 맡기지 않고 안방 금고 속에 감출 것이다. 아무리 원칙이 옳다고 하더라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검은 돈이라도 활성화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새겨두어야 할 점은 인간세상에서, 그것도 정치적 선택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금융실명제는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그 어떤 문제들 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느슨하게 고치거나 폐지하기보다는 좀더 엄격하게 시행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단도직입으로 질문해 보자. 금융실명제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금융거래를 투명하게 함으로써 경제정의를 실천하자는 데 있다. 우리나라처럼 정경유착이 심한 나라는 더더구나 이런 제도를 하루 빨리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사회문제의 상당한 부분이 사실은 검은 돈의 음성적 흐름에 있지 않은가.
예컨대 기업들의 비자금만 해도 그렇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중에 정치자금을 받지 않았지만, 전임 대통령들은 기업들에게서 수백억 내지 수천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 기업들이 정상적으로 기업 활동을 하든지, 혹은 정부의 특혜를 받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청와대에 바쳐야만 했다. 물론 야당에게도 이런 돈이 흘러들어갔다.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관료, 심지어는 각종 공직의 중하위직자에게 까지 상당히 많은 뇌물성 촌지가 전달되었다. 이런 돈이 바로 비자금, 즉 정상적인 장부정리에서 제외된 채 특별 관리된 자금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비자금이 어떻게 조성되는지 아주 간단하다. 100원 주고 사온 물건을 120원 짜리라고 회계정리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20원이 남게 된다. 반대로 실제로는 120원에 팔고 장부에는 100으로 기재하게 되면 또 20원이 남게 된다. 지난번 한보 사건의 경우를 보면 실제로는 50명의 직원만 쓰면서도 장부상에는 80-100명으로 정리해서 30-50명분의 인건비를 빼돌리는 수법도 있었다. 이렇게 모아진 돈이 국회, 정부, 청와대, 여야 정당 등, 곳곳에 뿌려졌다. 이를 막아낼 방도가 어디 있었겠는가. 금융실명제다.
간혹 증권가에 ‘큰손’ 운운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거액들이 증권가를 누비곤 한다. 사채시장도 역시 그렇다. 사채는 대개 이율이 높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 거의 공짜로 큰돈을 빌려 쓸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난번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 건 때 밝혀진 경우를 보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아주 싸게, 거의 공짜로 그의 돈을 빌려 썼다. 이런 부도덕한 일들이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는 관행이다시피 했다.
이런 일들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특단의 조치가 금융실명제였는데, 이걸 뜯어고치자는 소리가 너무나 당당하게 울려나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의 어려운 경제상황이 검은 돈이라도 활용될 수 있는 숨통을 터주어야 한다는 현실론을 지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역사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비록 어느 정도의 불편이 있더라도 투명한 금융활동을 정착시키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경제는 나쁠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불황을 트집삼아 경제정의를 지연시키려는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워야 한다. <199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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