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치 않은 목사의 길
정용섭(샘터교회 목사)

지금은 좀 덜 그런 편이지만 40대 때만 하더라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졌다. “어떻게 목사님이 되셨나요?” 물론 이런 질문은 나만이 아니라 대개의 목사들은 한 두 번은, 아니 수없이 받았을 것이다. 성직자가 되었으니까 무언가 다른 사람에게 없었던 특별한 경험이나 동기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질문인 것 같다. 그들이 기대할만한 화끈한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오죽 좋겠는가. 그런데 나에게는 그들에게 들려줄만한 게 거의 없다. “그냥 어쩌다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는 내 대답을 들은 그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아, 그러셨어요!” 하고 대충 넘어간다. 아마 형식적으로 물어본 것이니까 형식적인 대답을 듣고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지나쳐주는 분들이 고맙다. 그런데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래도 신학대학교에 가게 된 어떤 영적인 동기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럴 때는 하는 수없이 “일반 대학교에 갈 돈이 없어서 신학교에 갔습니다.”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마 그분들은 속으로 ‘시원치 않은 목사로군!’ 했을지 모른다.
이런 열등감은 지금도 여전하다. “성직자의 길을 어떻게 걸어 왔는가?”에 대해서 뭔가를 쓰라는 공동선의 원고청탁을 받고 좀 당황했다. 솔직히 지금 나는 ‘나의 길’이라고 내놓을 만한 게 하나도 없다. 목회와 신학에서 어떤 업적이라 말할 만한 게 없으며, 그렇다고 큰 깨달음 같은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으면 아예 원고청탁을 거절했었어야 했는데, 이런 일에도 나는 딱 부러지게 맺고 끊지 못하는 사람이다. 잡지사에서 나름으로 생각해서 청탁을 한 건데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거절 같은 걸 한단 말인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어쭙잖은 글을 쓰게 되었다. 모양이 좀 우습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이게 내 본 모습인데 말이다.
내가 신학공부를 마치고 군목을 거쳐 잠시 독일 유학을 다녀온 다음에 본격적으로 목회를 시작한 건 1986년 6월이다. 대구에 인접한 달성군의 한 면소재지인 현풍에서 소위 ‘교회개척’을 했다. 만으로 서른 세 살의 나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 12년 동안 그곳에서 목사로 지낸 시절이 꿈만 같다. 청소년들을 합해서 50명 정도의 교우들과 그런대로 괜찮은 공동체를 꾸려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다른 목사들보다 유별나게 잘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아주 평범한 그런 목회 생활에 진력했을 뿐이다. 설교하고, 심방하고, 친교모임을 나누고, 사회봉사 하고, 어떤 목사이든지 해야만 할 그런 일들을 하면서 12년 동안 지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이해가 갈지 모르겠지만 개신교의 목사들은 신자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신자들의 크고 작은 경조사를 챙겨야 하고, 사고 친 신자 때문에, 혹은 신자의 가족 때문에 경찰서를 들락거리고, 심지어는 부부싸움을 말리러 다녀야 한다. 이게 정상인지 아닌지는 끊어서 말하기 힘들지만, 개신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건 교우들의 세상살이를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현풍에서 목회했던 12년의 결산은 무엇일까? 내가 여기에 내놓을만한 그런 업적은 전혀 없다. 교회가 부흥한 것도 아니고, 큰 인물을 키운 것도 아니다. 북한 돕는 문제, 에큐메니칼 운동, 그리고 사회변혁 운동에 내가 개인적으로 참가하고, 교우들도 그런 쪽으로 생각의 폭을 넓히도록 독려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교회가 의식이 있는 공동체로 변화된 것도 아니다. 청소년들이 자라서 함께 손잡고 일할 만하다 싶으면 대도시로 모두 떠날 때마다 좀 허탈했던 것 같다. 나는 현풍에서 그렇게 마흔 다섯 살까지 별 볼일 없이 아주 평범하게 목사생활을 했다. 남에게 내놓을만한 결과들은 없지만 그 시절은 내가 다시 꾸고 싶은 달콤한 꿈과 같다. 젊음과 정열이 푸른 숲처럼 내 삶을 채우고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2000년 3월 아내와 두 딸, 이렇게 우리 네 식구는 한국을 떠나 독일로 갔다. 나는 현풍에 이어 2년 여 동안 섬기던 영천교회를 사임하고, 하양의 모 대학교에 선생으로 있는 아내는 연구년을 얻고, 그 당시 고1이었던 큰 딸과 초등 4년이었던 작은 딸은 1년씩 휴학을 했다. 우리 가족은 1년 동안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주로 유럽을 여행했다. 대단한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가족이 함께 실컷 ‘논다’는 생각으로 한국에서의 모든 삶을 1년 동안 잠시 접었다. 목사로서 내 삶의 전반기는 이렇게 마무리 된 셈이다.
2001년 2월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기존의 목회 방식에 더 이상 머물지 않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지난 14년 동안의 목회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내가 그런 경쟁 구도에서 참으로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교회를 키워야 한다거나, 교우들의 가정문제와 개인문제에 깊이 관여하는데 필요한 내 영적인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잘한다기보다는 영적 에너지를 소진시키지 않고도 밀고 나갈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가르치는 일과 글쓰는 일이 그래도 다른 것보다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전에도 몇 군데 강사로 나가기는 했지만, 주로 목회에 주력했는데, 이제는 무게를 그쪽으로 돌리기로 했다. 목회는 가능한대로 소극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가능한대로 적극적으로 해보자는 심사였다. 결국 나는 아주 작은 공동체인 샘터교회와 연구시설인 대구성서아카데미를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샘터교회 활동에 대해서는 말할 게 별로 없다. 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모든 교회 활동은 끝난다. 지금으로서는 샘터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정확한 걸 말할 수는 없다. 별로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만에 하나 교우들이 늘어난다면 교회 활동을 늘려 잡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그럴만한 준비가 전혀 없다. 비록 초미니 교회지만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 공동체에 속해 있는 교우들은 성령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반면에 대구성서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 활동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중이다. 내 성격이 원래 소극적이기 때문에 대구성서아카데미 운동을 아무리 적극적으로 이끌어간다고 하더라도 남이 보면 좀 웃긴다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 딴에는 꽤 열심을 내는 일이다. 아카데미는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학 재교육을 목표로 한다.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를 딱히 구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는 구분된다. 목사들과는 주로 설교 문제로, 평신도들과는 성서공부로 친교를 나눈다. 설교와 성서공부는 한국교회 안에서 일반화한 작업이지만, 아카데미는 그런 작업들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설교의 전달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의 본질에 집중하고, 성서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 내 글이 어쩌다가 아카데미를 소개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는데, 의도적인 게 아니니까 이해를 바란다. 보여줄 게 워낙 없으니까 이런 걸 끄집어내게 된 것 같다.
지금 나는 대구에 인접한 경산시 하양읍에 살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아무 이름도 없이 작은 샘터교회를 섬기고, 지역의 기독교 운동인 아카데미를 힘닿는 데까지 끌어가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성직자로서 내 삶의 후반부를 조용히 끝내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누구는 세계 선교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는데, 나는 그런 데까지 사용할만한 힘이 없다. 보기에 따라서 이기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변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모든 게 자기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는 건 아닌가보다. 두 해 전부터 나는 내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고, 예측하지 못한 어떤 일에 연루되고 말았다. 그것은 한국교회 목회 현장에서 매우 낯선 ‘설교비평’ 작업이다. 목사들의 설교를 분석하고 비평한다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 아닌지는 나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 미숙하거나 본류에서 벗어난 설교라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청중들에게 어떤 영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설교비평이 앞으로 한국교회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거나, 설교의 품위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설교비평이 현재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작업이니까 조금 더 설명해야겠다. 나는 2003년부터 월간지 <기독교 사상>에 설교비평을 연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했는데, 주로 대중적인 설교자였다. 김동호, 하용조, 이동원, 김서택, 장경동, 이수영, 박영선, 이재철, 김상복, 임영수, 김기동, 윤석전, 김남준, 릭 워렌, 조용기, 김진홍, 마틴 로이드 존스(존칭 생략). 내가 보기에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큰 문제는 개인적인 차이가 많기는 하지만 신학적 깊이와 인문학적 소양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예상 외로 짧기 때문에 설교가 늘 천편일률이며, 더 심각한 것은 설교가 인간 삶의 흔적이라 할 인문학과 소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몇 분만 빼고 대개의 설교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에 천착하기보다는 대중추수주의에 빠져 있었다.
앞으로 당분간 설교비평 작업은 계속할 생각이다. 나의 설교비평이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다는 주변의 달콤한 말에 귀가 솔깃한 탓인지 모른다. 그렇게 큰 성과는 없다 하더라도 이런 작업을 통해서 설교와 예배를 비롯해서 교회의 모든 활동이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토대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한국교회에 전달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은 곧 합리성이 결여된 영성은 쉽게 광신으로 떨어진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어쨌든지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이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목사로서 빈둥거린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공동선' 2006년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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