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하루에 한 번씩 자전을 한다는데, 그 자전의 속도가 적도를 중심으로 계산해 보면 무려 시속 1.667km이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최신형 점보 여객기와 맞먹는 속도다.
다른 한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자그만치 1억 4천9백6십만km떨어져 있는 걸 감안하면 지구의 공전 속도는 자전에 비해 수십배에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엄청나게 빠른 비행기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자전과 공전으로 인해 지구는 낮과 밤을, 그리고 사계절을 갖는 별이 될 수 있었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은 이런 변화와 순환을 통해 훨씬 풍성한 생명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낮과 밤, 빛과 어둠은 그것 자체가 갖고 있는 존재론적 근거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인식론적 태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낮과 밤이 인간의 운명과 역사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는 뜻이다.
현대인들이야 초등학교 수준의 우주 물리학 지식만 갖고 있어도 낮과 밤의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의 실체가 무언지, 그 태양이 어디로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르는 건지, 새까만 밤하늘의 별들의 정체는 무언지, 그 별들이 왜 태양이 떠오름으로 사라지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 근원적으로 고대인들은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의 원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은 어디 이런 것뿐이었겠는가? 욥의 고백처럼 바다의 끝은 어딘지, 그 바닷 속에 사는 큰 물고기들과 하늘의 사나운 새들은 어떤 내적 근원을 갖고 있는지, 천둥과 지진과 화산 폭발의 이유 가 무언지 그들은 궁금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욥 38:16,18,25,27).
이 모든 대상들은 그 당시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신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짐작을 뛰어넘을 정도로 두렵기조차 하였다. 그 중에서도 낮과 밤은 더욱 그랬다. 이 낮과 밤의 문제가 고대인들을 실존적으로 감싸고 있던 세계와 자기 이해의 근거이며 출발점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빛을 가장 처음으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진술은 그럴말한 고대인들의 사유가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은 이렇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창세기 기자는 신앙고백적인 의미에서 이 세계와 사물 문제를 빛과 어둠으로부터 시작했다. 이 세계를 기초하고 있는 건 바로 빛이라는 생각의 반영이다. 이런 걸 보아도 고대인들이 얼마나 밤과 어둠을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밝아오는 아침의 햇살을 얼마나 큰 환희로 맞았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약간씩 형태를 달리하지만, 이집트인들이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의 모든 종교는 빛과 연결되어 있다. 요한복음서도 역시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을 대비하면서 그 당시의 영지주의적 사유를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물론 고대 이방종교의 자연숭배적 종교 양태에 나타난 빛의 의미와 구약성경에서 언급된 피조된 빛의 의미는 본질적인 면에서 지평을 달리하고 있지만 고대인들에게 빛이 얼마나 절대적인 대상이었는가 하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태양과 빛이 종교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대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빛은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는 일출 장면 앞에서 경험하게 되는 감상적 환희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연의 무자비한 위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고대인들이 직면한 생존의 문제였다.
일단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그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일상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맹수들의 습격이라든지 적군의 야습 같은 것에 대비할 수도 없었다. 이런 어둠은 전혀 조명 시설이 없거나 조금 괜찮다 해도 별 차이가 없이 동굴이나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던 고대인들에게는 죽음과 같은 정도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악귀들이 항상 밤에만 행동하고 있다는 건 어둠에 대한 고대인들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 어둠을 몰아내 주는 태양 빛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당연히 구원자일 수밖에 없었다.
빛을 구원으로 생각한 인간은 밤과 어둠의 영역을 점차 축소시키고, 낮과 밝음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게 인간 문명의 역사다. 문명은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능력과 비례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문명의 시금석이었다. 급기야 전기를 발명하게 되자, 인간은 밤을 낮처럼 만들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여 낮과 밤은 구분했지만, 이제 인간이 전기를 창조하여 그 구분을 없애 버리에 된 셈이다. 고대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낮 시간인 12시간 정도라면 이제 현대인들에게는 마음만 먹는다면 거의 24시간이 몽땅 허락된다.
이렇게 밤을 낮으로 만든 인간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득을 올리고, 소비하고, 그리고 그 생산력으로 도시를 넓히고, 자연을 파괴하고, 약소국을 정복하며, 더 많은 불을 밝혀 놓고 살게 되었다.
이게 인간이 빛을 만들어 밝음의 세계를 넓힘으로써 실행해 놓은 구원의 역사다. 이런 빛의 자녀들은 과연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어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참된 구원에 참여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대낮처럼 밝혀 놓고 살아간다고 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평화, 그리고 희망과 사랑이 획득되는 건 아니다. 밤이 축소되었다고 해서 인간 세계에 죄와 두려움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밤이 없는 세상인 서울과 동경과 라스베가스와 뉴욕 같은 도시가 전기 없는 강원도 두메산골이나 아마존 강 부근의 어느 원주민 마을보다 훨씬 인간다운 곳이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불을 밝혀 놓아도 역시 불안해하고 파괴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한다. 그게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밤과 어둠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문명인들에게 잊혀져 가는 밤과 어둠은 될 수 있는 대로 쫓아내 버려야 할 저주와 두려움의 세계가 아니다. 밤은 밤대로 생명의 세계에 속한다.
밤은 밤이 갖는 양식(樣式)으로 밤의 생명력을 갖는다. 밤은 어둠이라는 양식으로 지구를 살려낸다. 밤은 휴식을 통해서 활동을 준비케 하는 나름대로의 생명의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낮만이 아니라 밤도 관리하시며, 이 두 세계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늘 저편에 반사경을 설치하여 영원히 밤이 없는 지구를 만들어 낸다해도 인간 구원은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원래 있던 밤의 영역이 줄어들수록 인간 생명의 질은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지구는 본래 낮과 밤이 순환되므로써 유지되도록 창조되었드며, 이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인간도 역시 낮과 밤이라는 두 세계와 더불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는 단편소설이 옛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어느 목동이 주인집 아가씨와 뜻하지 않게, 양들이 풀을 먹고 있는 산언덕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밤새 나눈 따뜻한 이야기다. 그런 밤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경험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생명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알퐁스 도데가 그리고 있는 소설가적인 감상주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밤이 갖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우리는 밤을 우리 삶의 현실에서 밀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된다. 낮은 반드시 밤이 있으므로만 존재하며 밝음은 반드시 어둠이 있으므로만 존재한다.
밤과 어둠을 보르면 낮과 밝음도 모른다. 죽음의 공포를 모르면 살아 있음의 기쁨도 모른다. 악의 현실을 외면하면 선의 현실에 참여할 수도 없다.
이처럼 밤과 낮의 상호성이 인식될 때만 우리는 그것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이 지구의 호흡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만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숨결을 자신의 숨결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안에서 존재하는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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