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포먼

지난 11월6일 미국 라스베가스 그랜드 호텔 특설 링에서 벌어진 WBA. IBF 헤비급 통합 타이틀전에서 45세의 조지 포먼은 자기보다 무려 20세나 젊은 챔피온 마이클 무어러를 10회에 KO로 캔버스에 누였다. 그는 74년 알리에게 KO패 당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가 87년에 링에 복귀해 활동하다가 이번에 드디어 세계 챔피언에 오르게 됐다. 권투라는 운동이 골프처럼 최소한의 체력만 갖추면 집중력만으로 해결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권투선수로서는 할아버지 나이에 든 그가 자기 아들 벌 되는 젊은이들과 시합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미친 짓>인데, 이번 싸움에서 KO로 승리했다는 것은 참 기괴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현재 헤비급 선수들이 모두 약해 빠진 건지 아니면 포먼이 삼손처럼 초인적 체력을 타고 났는지 모르겠지만 포먼의 사건(?)은 많은 미국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가능성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가 다 늙은 나이에 다시 권투 시합을 벌이게 된 이유에 있다. 그는 77년도에 은퇴한 후 복음 전도사로 변신했는데, 선교활동에 필요한 기금마련을 위해 다시 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번의 승리로 그는 약 8억 원의 대전료를 챙길 수 있었으며, 앞으로 챔피언의 입장에서 방어전을 치르게 된다면 더 많은 개런티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청소년 선교를 위한 전도관 건립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즐거워하고 있다.
권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매우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권투를 스포츠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있는걸 보면 권투가 스포츠로 인정받고 있긴 한 모양인데, 그러나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구타하면서, 그것도 가능한대로 정신을 잃고 넉다운 될수록 좋다고 생각하면서, 과연 스포츠라고 불릴 수 있는지 의아스럽다. 권투 시합을 하다가, 혹은 끝난 다음 후유증으로 사망한 경우가 심심하지 않게 발생하는 일이 있다. 아마추어 권투는 그래도 헤드기어를 끼고 하니까 치명적인 위험성에 노출되지는 않지만, 프로 권투는 보호 장치래야 겨우 마우스피스 하나에 의지하여 그야말로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두들겨 패는 경기이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를 위험한 운동이다.
프로 권투는 주로 미국과 미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던 나라를 중심으로 흥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멕시코, 한국, 일본, 태국 등의 나라가 그렇다. 미국인들은 권투를 범국민적 차원에서 즐기고 있는데, 이에 반하여 유럽인들은 별로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권투만큼 미국적인 성격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주는 스포츠도 드물다. 권투 시합은 두 사람이 정정당당하게 링 위에 일 대 일로 싸운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두 주먹으로 상대방의 얼굴이나 복부를 가격함으로써 무릎을 꿇게 하는 시합이다. 간혹 미국 서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주먹질이 그런 것들이다. 멋진 카운터펀치(받아치기)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그 순간을 즐긴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정복하려는 미국인들의 정서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 보다 훨씬 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배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격투기라 할 수 있는 <태껸>은 일종의 자기 수련을 위한 道임에 반해 권투는 상대방의 무릎을 꿇게 해야만 하는 <생존경쟁>이다. 미국은 그러한 지배적 자세로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을 몰아냈고, 이제는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지키는 파수꾼 행세를 하고 있다.
아직도 그런 야만적인 스포츠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무얼까? 고대 로마 시대 때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대개 노예들로 구성된 격투사들이 피를 뿌리며 벌이는 싸움판을 관람하면서 환호성을 치던 로마인들과 오늘의 프로 권투 경기장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텔레비전 앞에서 둘러앉은 이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인간의 피에 흐르고 있는 카인의 파괴적 본능이 그런 면에서 우리들을 하나로 엮어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러한 파괴적 심리적 현상을 <새디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100kg 이상 되는 덩치들이 흐느적거리며 나자빠져 뻗어버리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인간 모두가 항상 천사 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때로 싸우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권투와 같은 운동경기가 어떤 면에서 인간의 파괴적 본능을 내적으로 승화시켜 주는 역할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권투와 그런 류의 현대 문화는 인간의 내적 심성을 오히려 공격적이고 지배적으로 자극하게 마련이다. 지존파 단원들이 폭력물 비디오나 영화를 보고 엽기적 살인행각을 배웠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매우 세련되고 교양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내면에 있어서는 폭력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란 신체적 위협만이 아니라 이 사회 안에 내재해 있는 모든 억압구조를 뜻한다.
어느 권투 선수의 부성애가 눈물 나도록 감동적으로 그려진 <챔프>라는 영화나, 혹은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감미로운 노래 <The Boxer>가 있다고 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다시 링에 올랐다는 -그 말이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조지 포먼의 그런 순진성과 열정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권투시합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한다고 본다. 재미가 곧 선은 아니기에. <9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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