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청문회

지난 4월7일 부터 국회 한보특별위원회 청문회가 시작됐다. 그동안 한보그룹 오너인 정태수 회장, 재정본부장인 김종국 씨, 전 서울은행장 손홍균 씨, 전 제일은행장 이철수 씨 등이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질문을 받았다. 십여 명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안간힘을 썼지만 증인들에게서 필요한 답변을 하나도 끌어내지 못하고 시간과 정력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모른다, 기억이 없다, 재판중이어서 답변할 수 없다, 확인해 줄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잘못됐지만 그때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거의 이런 말로 위원들의 질문을 피해갔다. 지금 까지 진행된 걸로만 본다면 이번 청문회는 청문회 위원들 보다 불려나온 증인들이 훨씬 노련했다. 노회한 증인 대 미숙한 위원들의 말싸움이라면 이미 결과는 뻔했다. 티비로 생중계 할 정도로 중차대한 사안인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아니 오히려 증인들의 자기변호의 장이 되고 만다면 아예 하지 않느니만도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청문회 무용론이 벌써 제기되고 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이번 청문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여야위원들은 증인들의 뻔뻔스런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증인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모른다거나 부인하는 건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누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술술 불겠는가? 증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한 모른다거나 기억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게 상책이다. 증인들에게 회개하는 심정, 위증죄 운운으로 솔직한 답변을 기대했다면 위원들이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무책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청문회가 무기력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위원들의 무능력에 있다. 수사권이 없다거나 증인들의 거짓답변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건 자신들의 무능력을 가려보고자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만약 제도적으로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면 제도를 고친 다음에 하든지 아니면 아예 청문회를 열지나 말던지 해야지 증인들과의 입씨름에서 철저하게 농락당한 다음에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건 옹색한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증인들이 아무리 거짓으로 증언하거나 시치미를 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닌 한 어딘가에 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진다면 증인의 진실을 얻어낼 수 있다. 수억 원의 뇌물을 받은 은행장이 그것이 대출과 아무 상관 없이 받은 돈이라고 주장하거나 정부와 청와대로 부터 아무런 압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할 때 솔직해지라고 반복해서 말하거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증인에게 훈계조로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흥분해서 소리를 높일게 아니라 그걸 뒤집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걸 누가 집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게 바로 청문회 위원의 능력과 직결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위원들에게 그런 능력이 떨어졌다.
한편으로 어떻게 보면 위원의 능력문제라기 보다는 더 근원적인 문제가 숨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위원들 스스로 어떤 한계를 정해놓고 접근하기 때문에 변죽만 울리는 게 아니냐 하는 점이다. 가능한대로 적당한 선에서 해결되는 게 모두에게 좋다는 전제를 갖고 시작했을 수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치권 전체가 침몰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여야 모두 씻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 정치는 정경유착, 파벌, 가부장적 조직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정태수리스트에 33명의 국회의원, 자치단체장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만,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이렇게 문제가 심각하게 터진 한보 말고 다른 기업체들과 비슷한 관계를 가진 정치인들도 부지기수다. 정치인은 정치적 힘으로 특별금융을 지원하고, 기업가는 정치인과 은행책임자에게 뇌물을 주고, 은행장은 기왕에 돈장사 하는 거 정치인들의 힘을 깔고 자의반타의반 특혜대출을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부도내지 않고 장사 잘하면 뛰어난 기업가요 정치인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기업을 운영했고 정치도 그렇게 했다. 그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어와 악어새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보사태는 우리 모든 정치인들에게 일종의 원죄와 같기 때문에 자신이나 자신의 당, 혹은 그 보스가 직간접으로 연관된 문제를 적극적으로 파헤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난 80년 말에 있었던 ‘5공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증인들을 굴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이 없었다. 자신들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더 나아가서 정당성을 갖는다는 입장이었다. 정태수씨는 포철에 버금가는 제2의 철강기업에 대한 자신의 꿈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국회의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돈을 갖다 준 것에 대해서도 별로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 은행장들도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겉으로는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누가 죄인이고 누가 심판자인가? 겉으로만 달랐지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똑같았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나온 이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실상이며 우리 자신이다. 재수 사납게 일이 뒤틀려버렸을 뿐이지 혼자만 죄를 뒤집어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달리 인격적으로 철면피하거나 부도덕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의 구조적으로 부도덕한 사회에서 앞잡이 노릇만 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보사태에 관한한 우리 모두가 공범자다. <1997.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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