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 내 주변에 목사 두 분이 상(喪)을 당해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김 목사님은 40대 초반의 젊은 목사로서 민중 교회에서 시무하는데, 부친상을 당했다. 동해안 어느 공원 묘지에 장례를 치룬 그 날은 엄청나게 추웠다. 한편 백 목사님은 일반 교회에서 시무하는 60대 중반의 목사로서 아내상을 당했다. 가창쪽에 있는 봉사교회 묘지에 시신을 모셨는데 장례식 날은 비교적 푸근한 날씨였다.

김 목사님의 아버지는 장로로 충성스럽게 봉사하시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셨다. 백 목사님의 부인은 수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오랫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세상을 뜨셨다.

한 분은 아버지를 졸지에 잃었고, 다른 한 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이들이 갖게 될 상실감은 그 어느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며, 오직 저들만이 져야 할 인생의 쓰라린 상처이며 아픔이다.

언제부터 가족이 죽었을 때 땅에 묻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장례 문화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또 하나의 인간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만이 자기의 동류를 장사 지내는 동물이다. 개가 개를 장사 지내지 않으며, 고양이가 고양이를, 원숭이가 원숭이를 장사 지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죽음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자기 부모를, 남편을, 친구를, 때로는 자식을 장사 지낸다.

장사 지낸다는 것은 인간이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자기의 유한성을 의식한다는 것이며, 유한성을 의식한다는 것은 영원성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고대로부터 자기의 가족과 이웃이 죽는 것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절실하게 생각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들은 자기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건축하였고, 일반인들도 장례식만큼은 가능한 대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치루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꽃상여나 곡소리가 그것이다. 예술가들도 자기의 유한성을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통해 극복해 보려고 애를 썼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죽음은 너무도 절대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이외의 것을 상대화 시킨다. 사생결단 기를 쓰고 쌓아 놓은 재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죽음 앞에서 그 이외의 것들은 흡사 쓰레기에 불과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도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도 죽음에 대해 확증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세계를 경영할 만큼 정치, 경제적인 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그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다.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죽음과 유사할 뿐이지 죽음 그 자체는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예외도 없이 죽음 이편에서만 살아갈 뿐, 죽음 저편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넘어갔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죽음은 존재의 상실이라는 면에서 근본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존재라고 말하는가? 오늘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모든 사물의 현상이 바로 존재 자체는 아니다.

현대 물리학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과 사물에 대해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물질의 미세한 조직 안에 공간과 운동이 결합되어 있다. 작은 물질로 들어갈수록 거기에는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가 없어지며, 다만 작은 입자의 운동과 에너지, 그리고 공간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가시적인 현상계만을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아직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지 모른다.

죽음이란 일단 현상계로부터 유리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현상계만이 존재가 아닌 것처럼 현상계로부터 떨어져 나감이 바로 비존재로 변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죽음이란 존재 양식의 변화이지 무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생물학자요, 카톨릭 신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진화론 신학의 주창자이다. 그는 일곱 살 때 갑자기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강렬한 철학적 혼미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경험은 이렇다.

샤르뎅의 어머니가 그에게 한 줌의 머리카락을 보여준 후 성냥불을 갖다 대자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불에 타 연기로 사라졌다. 이를 본 어린 샤르뎅은 그 순간 무의 심한 부조리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자문했다. “왜 사물은 존재하는가? 왜 거기에 종말이 있는가? 존재의 깊은 이유도 모르는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유래되었는가?”
아름다운 여인도 시간이 지나면 늙고 병들고, 결국 죽어 한줌의 흙으로 변한다. 미국의 대표적 작곡가요 지휘자였던 번스타인도 아깝게, 그러나 당연하게 죽었다. 스페인 태생의 세계적 테너가수인 호세 카레라스는 몇 년 전 백혈병을 앓다가 다행히 치료 되었지만, 그도 언젠가는 불에 타 사라지는 머리카락처럼 이 땅위에서의 삶을 끝내야만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경은 다른 방법으로는 죽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범죄한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죽음은 징벌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의 축복이 아닐까? 그 분의 은혜요, 그 분의 의로우심이요, 그 분의 고유한 심판 방법이 아닐까?

만약 어느 누가 이 땅 위에서 천 년을 산다면 그는 자기 삶을 저주하게 될지 모른다. 이 땅 위에서 지나치게 긴 시간 동안 사는 것은 삶을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70,80년이라는 인간의 수명을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자리에서 죽음을 예찬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죽음은 피해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새로운 존재론 가운데서 그것을 해석하자는 제언일 뿐이다.

어느 부자가 추수를 넉넉하게 마친 후 흐뭇하여 마음 속으로 다짐하기를, 창고를 늘리고 먹을 것을 가득 채운 다음 오랫동안 먹고 마시며 즐겨 보자고 했다. 그 때 하나님이 그 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을 불러가면 너의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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