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비록 육신의 건강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되뇌고 있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 말씀에 근거하여 사는 이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세 단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단순히 종교적인 범주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반적인 삶에 관계된 것이다. 사실 종교는 구체적인 인간을 제외시킨 채 순전히 관념적인 도그마만을 형성하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하면 종교의 가르침은 인간과 그 삶을 기초로 해서만 행해졌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삶의 현실적인 언어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믿음은 기독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가르침이다. 믿음으로 거듭나고 의롭다고 인정받고, 더 나아가서 거룩한 생활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능력이 이 믿음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믿음은 이 세상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무언가 의심쩍은 것이라도 무조건 믿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믿음이 좋을수록 이 세상의 합리적인 논리를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자기의 교리나 체제에 빠져든다. 이건 독단론이다. 외부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자기 소리만 내지르는 독선이다. 이제는 그런 고전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없겠지만 공산주의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여서 다른 체제나 이념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과 흡사하다.
이런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는 그런 믿음이 통용되었으며, 더 나아가 이런 기준으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정죄해 왔다.
믿음이란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의 논쟁이 두렵기 때문에 빠져드는 일종의 종교적 자폐증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 즉 죽음과 불안과 기쁨과 미래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인격적 결단이다.
인간은 아무리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태도로 모든 삶의 부분들이 드러나는 건 아니다. 인간이 빠져들기 쉬운 돈이나 쾌락만이 우리에게 확실한 건 절대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이 구체적인 것이며, 사실적인 것이며, 확실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것은 불확실하고 추상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케 하고 생명을 창조하고 일구어 가시는 그 분만이 확실한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분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의존하고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을 믿는 이들이며, 동시에 진리를 믿는 이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무상한 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그분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긴다. 그 분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이런 생명과 진리만이 참되고 영원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사람들은 생명과 진리보다는 물질적인 확실성이 인간을 구원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요사이 우리 나라는 대통령으로부터 일반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앵무새처럼 경제 제일주의를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인 풍요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금욕주의나 매조키즘(Masochism)에 빠져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물질을 믿고 살이도 않는다. 진정으로 우리를 맡길 수 있는 대상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둘째, 소망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 가운데서만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이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종말론적 소망이야말로 인간 구원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세상에서도 나름대로 소망을 판매하고 있다. 정치꾼들이 국회나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고 싶은 소망, 혹은 자식을이 명문대에 합격하길 바라는 소망, 기업이 번창하게 될 날을 기다리는 소망 등이다.
인간은 이런 기다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이런 소망을 부추기기도 하고 강요하기도 하지만, 실상 그런 것들은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크게 상관 없는 일들이다. 간혹 그런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그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다.
기됵교에서 말하는 소망은 개인의 소원이 성취도기를 원하는, 그것이 아무리 진솔하고 소박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꿈을 말하지 않는다. 종말론적인 구원을 끌어오는 진정한 소망은 진리와 생명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현실화될 수 있다. 이런 소망이야말로 세상의 거짓된 소망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 사랑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안에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갖고 사는 이들이 현재 추구해야 할 최고 가치의 삶일 뿐만 아니라, 구원과 소망의 존재론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만이 사랑할 수 있으며, 구원의 세계를 소망하는 자들만이 사랑할 수 있다.
역으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며, 구원을 소망하는 이들이다. 요한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가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감상주의적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전 존재에 관련된 것이다.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가정의 실용 도구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자기 존재가 상실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그리스도인일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상호 관계 속에 있지만, 사랑을 통해서만 믿음과 소망이 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이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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