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삶의 현장

신문보도에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순위집계를 보면 대개 드라마가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라마에 열중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각 방송사마다 사운을 걸고 드라마 제작에 열을 올린다. 물론 괜찮은 드라마가 없는 게 아니지만 대개는 순전히 시청률 경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의 말초적 감각에 호소하거나 진부한 내용을 단순히 말장난으로 질질 끄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가운데서도 간혹 비드라마 부분이 드라마 못지않은 인기를 끄는 경우가 있는데,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보도, 예컨대 12.12 첫 번 공판 같은 것들이나 나라의 자존심이 달려있는 스포츠 중계, 혹은 ‘PD수첩’이나 ‘추적60분’, ‘시사매거진 2580’ 등이다. 그 외에도 ‘TV는 사랑을 싣고’ 류의 코끝 찡한 프로그람도 역시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다. 높은 시청률을 보인다는 건 그만큼 내용이 충실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높은 시청률과 높은 작품성과는 때로 반비례로 나타난다. 그래서 시청률 집계에서는 뒤쳐지지만 문예평론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는 프로그람이 있기도 하며, 동시에 그 반대현상을 보이는 프로그람도 있다.
그런대 시청률에서 항상 10위권 안에 들어오면서도 좋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거론되는 게 KBS2의‘체험, 삶의 현장’이다. YWCA는 지난 3일 ‘YWCA가 뽑은 좋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평화부문 으뜸상으로 이것을 선정했다. 조영남 씨와 다른 개그우먼이 공동사회자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람은 유명 탤런트나 정치인, 기업가, 예술가 등,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상당한 분들을 아주 힘든 노동현장으로 끌고가서 평소에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일을 실제로 체험하게 한다. 고상하게 살던 이들이 험한 일을 몸소 겪음으로써 다른 이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 화면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게 되는 시청자들도 역시 출연자들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이 사회에 계급적 차이를 허무는데 일조를 했다는 뜻에서 평화부문 으뜸상을 받은 것 같다. 일단 이 프로그람은 성공했다. 시청률도 높고 평론가들에게도 높은 점수를 받을 만큼 성공적인 프로그람임에 틀림없다. 어눌하면서도 꾸밈없는 조용남 씨의 대중적 인기와 이런 프로그람의 사회를 맡기에는 나이가 턱없이 어린 개그우먼의 입담이 어우러져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붙들어 매는데 일단 성공했다. 여기에 담겨있는 정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비교적 진솔하게 담아내는 노동현장의 현실감이며, 다른 하나는 높은 계층이 낮은 일을 하는데서 느끼게 되는 대리만족이다. 과연 ‘체험, 삶의 현장’은 좋은 프로그람인가? 성공했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프로그램은 결코 아니다. 그 프로그람에 참여한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걸 볼 때 마다 웬지 모르게 역겹다. 그 이유가 무얼까?
우선 출연자들이 모조리 사회 저명인사라는 것이 못마땅하고, 사회자들의 경박한 코멘트도 맘에 안 든다. 일당을 받아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내는 것도 너무 의도적인 것 같아서 보기에 좋지 않다. 이런 것들은 아마 주변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 프로그람이 노동을 추상화 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곧 노동의 상품화를 뜻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노동의 현실이 연예인들에 의해 감상적 차원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고위 정치인들이,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스타들이 단 하루 품을 파는 게 무슨 삶과 노동의 체험인가? 더구나 TV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듯이 땅을 파고, 나무를 져 나르고, 톱질하는 게 무슨 노동인가? 그들이 일당 외에 방송국으로 부터 출연료를 받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만약 받는다고 하면 이것처럼 큰 속임수는 없을 것이며, 설령 받지 않는다고 해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막노동을 한 것으로는 결코 노동의 현실이 무언지 알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손님일 뿐이다. 카메라맨을 대동한 높은 손님일 뿐이다. 그날 하루의 품 파는 일이 나쁘게 보면 인기관리에 불과하며, 좋게 보면 동정심에 불과하다.
이 프로그람에서 보여주는 노동의 현실은 철저하게 추상적이다. 연출자는 인기인 출연자의 서툰 몸동작과 전문 노동자의 익숙한 몸동작을 견주면서 시청자의 재미를 돋우고 있는데, 과연 연출자나 출연자나 사회자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익숙한 몸동작의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을까? 이런 프로그람이 노동자의 인간다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있을까? 천만에다. 그들에게 노동은 여전히 웃음거리며 상품이며 유희다.
우리는 노동을 좀더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노동의 현실은 팔자 늘어진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쯤 시간을 내서 부담 없이 체험해도 좋을, 그리고 그런 그림을 편안하게 앉아서 웃으며 즐기고 때로는 코메디화 해도 좋을 그런 대상이 아니다. 노동의 현실은 약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곳은 생존투쟁의 장이다. 때로는 팔이 잘려지고 손가락이 절단되고 디스크가 걸리며, 아주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현실이 바로 노동의 자리다. 그렇다고 해서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다. 목재소의 일꾼은 분명히 내무부장관 보다 훨씬 나무를 잘 져 나르고 자르기도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몇푼 받지 못한다. 그래도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만 한다. 과연 ‘체험, 삶의 현장’ 팀은 노동과 노동자의 현실을 얼마나 고려하면서 이런 프로그람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섣부른 체험놀이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약 올리고 화나게 할 뿐이다. 놀이로 하는 일과 살자고 하는 일은 천지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9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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