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우리의 딸들

지난 16일 대구 MBC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을 보러 대구 우방 타워랜드 야외 공연장 입구에 몰려든 청소년 청중 1만 여명이 앞으로 밀려드는 바람에 15세 짜리 여중생과 여고생이 압사했고, 4명이 크게 다쳐 입원중인데 그중에 한명은 폐와 간을 다쳐 뇌사상태라고 한다. 꽃봉리 같은 나이의 소녀들이 무엇엔가 정신을 빼앗겨 그렇게 난폭하게 달려들다가 결국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런 오늘의 광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나이의 소녀들이 환락가에 빠져드는 일들도 비일비재하지만 이번 사 건 처럼 일개 지방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공개방송에 일만 명에 이르는 소녀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대들었다는 건 어딘가 우리 사회가 병들고 있음을 직간접으로 알려주는 징표라 하겠다.
이날 공연을 보기 위해 극성팬들은 학교도 결석한 채 새벽 3시 부터 우방 타워랜드 인근에서 노숙을 하며 공연장 입장을 기다리거나, 혹은 대충 오전 수업만 마친 채 조퇴하고 공연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한반에 10-20명 씩 이런 조퇴자가 생겨서 어떤 학교에서는 아예 5교시만 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정도였다.
이번 공연에 초청된 연예인 중에 핵심은 남성 5인조 <H.O.T.>였다고 한다. 그들은 <전사의 후예>, <캔디> 등으로 올해 중반부터 10대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왔다고 하는데, 이들 이름은 <High-five Of Teenage>, 즉 <십대의 하이화이브>라는 뜻을 갖고 있다. 16-18세의 청소년 5명으로 구성된 고교생 그룹인 이들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우리 가요계를 석권하다시피 한 댄스뮤직을 주로 부른다. 특히 그들의 감각적 몸동작과 원색적 복장 및 노랫말은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소녀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그날도 사고 후에 천여 명의 소녀 팬들과 함께 우방랜드 진입광장에서 춤과 노래로 열광했다고 한다. 철부지들인지, 아니면 친구들의 죽음 까지 초월할 정도로 열정을 갖고 있는 이들인지 아무리 신세대라고 하지만 실망스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다.
우리의 딸들을 누가 죽게 했나? 우리의 딸들을 누가 죽음 앞에서도 춤과 노래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나? 직접적으로는 방송사와 우방랜드 관리책임자들이며, 간접적으로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기성세대들이다. 2,500명 수용의 공연장에 1만여 명의 청중이 모이도록 부추긴 방송사는 단순히 흥행에만 관심을 두었지 청소년들의 정서함양과 안전에는 아예 무관심했다. 구름떼처럼 몰려든 딸들을 보고 주최 측에서는 아마 ‘한껀’ 올렸다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출입문을 열기만 하면 청중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챙겨둘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주최자들의 생각은 그곳에 모여들 딸들이 아니라 그들이 준비한 <이벤트>에만 집중됐을 뿐이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근원적인 병폐다. 인간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소외된다는 점이다. 어린 딸들을 위해 준비한 공연이 오히려 그 딸들을 죽이게 되었다는 건 그걸 준비한 이들이 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사업을 위해서만 마음을 쏟았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 자선사업이 아닌 다음에야 사업적으로 운영한다고 해서 크게 탓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공경>은 아니라 하더라고 <인간대우>는 배려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벌떼처럼 그곳에 몰려든 일만 명의 우리 딸들은 어떤 최면술에 걸려든 것인지 모르겠다. 그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정신적 현상이기도 하다. 오직 광란적으로 흔들어 대는 가수들에게만 구원이 있듯이, 그런 장소만이 탈출구이듯이 우리는 우리 딸들을 몰아가고 있다. 아니 우리가 앞장서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우리 시대는 <연예인 전성시대>다. TV화면에 얼굴을 낼 수 있는 연예인들이 이 시대를 이끌어간다. 이 시대가 진정한 스승을 갖지 못한 탓인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영웅이 없는 탓인지 오로지 TV에 얼굴을 자주 내미는 연예인들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직장인들이나 가정주부들도 거의 연예인들의 자질구레한 이야깃거리로 소일한다. 방송사들은 경쟁하듯이 연예인의 일상을 화제로 올려놓는다. 갑자기 ‘튄’ 남 탤런트의 군 입대가 주요 뉴스거리가 될 정도니까 할 말이 없다.
사람이 사는데 이런 연예인들이 없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하다. 로마시대도 역시 전문적인 유랑극단이 있었고, 옛 우리나라에도 천대를 받았을망정 남사당패 같은 일종의 연예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노래와 춤과 연극은 우리 삶의 내부를 드러내주고, 슬픔을 극복케 해주기도 자극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우리의 연예사업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천박하게 하고 치졸하게 만들고 가볍게 만든다는데 있다. 물론 가벼운 웃음거리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주류가 되어간다는 건 어떻게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어린 딸들, 특히 십대들은 기성세대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공부를 왜 하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문학과 예술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배울 틈이 없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 그들의 귀에 들린 것은 온통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이들에게는 <H.O.T.> 보다 더 정열을 쏟아야 할 대상이 없다. 공부를 노동하듯이 힘겨워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딸들이 안식을 취할 대상은 그런 댄스그룹 뿐이었다. 그들의 구원은 그곳에 있었다. 가엾은 우리의 딸들이여! (9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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