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주의자

얼마 전 해외 토픽에 팔등신 미녀 두 사람이 몽땅 벗고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을 보았다. 다행히 뒷모습이었고, 그 두 여자 사이로 수영복을 입은 한 남자의 어정쩡한 모습이 카메라 앵글에 잡혀 있었다.
“이곳에선 벗어야 해요.”라는 제목 하에 프랑스의 유명한 나체촌 다그드 해변에서 나체의 여성 순찰 대원 두 명이 한 남자에게 나체촌의 규칙에 따라 옷 벗을 것을 종용하고 있다는 설명이 곁들여 있었다.
세계 최고 패션의 나라 프랑스에 의상문화를 거부하고 있는 나체촌이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옷을 예술로 간주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것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가 보다.
우리는 간혹 나체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될 때, 별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오지에서 문명과 담을 쌓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최소한 문명 세계 속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자기 육체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살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체주의자들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서구 세계에 오히려 많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들의 철학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가장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벌거벗은 인간의 육체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이 벌거벗은 몸으로 이 세상에 와서, 유아기에 벌거벗은 몸으로 살아가, 조금씩 이 세상의 문명에 적응하면서 옷을 걸치고 살아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된다. 의상으로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고 그 안에 안주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옷을 일종의 가면이나 마찬가지다. 나체주의자들은 가면을 벗는 일이 곧 옷을 벗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목욕탕에 함께 들어가서 그 친밀감을 더 깊게 느끼는 것도 이런 경험이 그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러시아 사람들은 햇살이 분수처럼 쏟아지는 날이면 공원의 잔디밭이나 자기 집 앞마당에 자리를 깔아놓고 비키니만 입거나 아니면 아예 웃통을 벗어젖히고 일광욕을 즐기곤 한다. 그것은 햇볕에 피부를 태우겠다는 실용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벗음으로부터 오는 정신적 해방감을 맛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은 벌거벗고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우 섬세한 의상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인간의 문명은 바로 옷의 발달사와 다르지 않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인간은 옷치장을 다양하게 하였다. 현재도 비교적 부유하게 사는 나라에는 최고급의 의상패션이 발달해 있지만, 개발도상국에 속한 나라에는 별로 이렇다 할 패션이 발달하지 못했다.
문명국의 역사를 보면 의상으로 지위와 신분을 구분하기도 했다. 헬라와 로마, 그 뒤를 이은 서로 문명뿐만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문명도 대단히 현란할 정도로 옷 문화를 발전시켰다. 반면에 어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주 핵심적인 부분만 가리고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살아가기도 한다.
동일한 문명사회 안에 살면서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패션의 차이는 적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한 벌에 수백만 원 가까이 되는 옷을 입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겨우 몇 천 원 짜리 옷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가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에서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프랑스의 파리나 한국 서울의 압구정동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옷을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도대체 옷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의미가 다른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상은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육체를 보호하는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심리적 만족을 제공하는 기능이다. 전자의 기능은 옷의 실용성과 편리성이 강조되며, 후자는 예술성이 강조된다고 하겠다. 이미 의상문화를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제거해 버릴 수 없는 시대가 된 만큼 이제는 이 두 기능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옷의 편리성만 강조하다 보면 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때가 있다. 자기만 편하다고 여름날 러닝셔츠 하나만 걸치고 외출을 한다거나, 혹은 청바지에 빨간 티를 입고 음악회장에 나타나거나,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예배를 드리러 간다면 그것 또한 남에게 좋은 기분을 주지는 못한다. 나이에 따라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도 우리가 이웃과 어울려 산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적지 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지나치게 심미적 관점에서 옷을 찾기 때문에 문제가 드러나는 일도 있다. 금년에는 미니, 내년에는 투피스, 또 어깨 라인이 어떻고, 색상이 어떻고, 하면서 세밀하게 옷을 골라 입는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이런 일들은 오히려 삶의 여유와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별로 미적 감각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벌에 수십만 원, 아니 수백만 원짜리 옷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사 입는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비싼 옷들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런 옷들이 일상적인 생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나라도 풍요로워진 탓인지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배출되었고, 그들이 만든 옷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 간다는 소식이다. 일부의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모델처럼 섹슈얼리티를 내보이려고 그런 비싼 옷을 사 입는다면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인간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옷을 입기 시작했을까? 구약성경을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사건에 옷이 연관되어 있다. 범죄 이전에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 2:15)고 전한다.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인간이라는 뜻)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하체를 가리고 덤불 속에 숨어 있었다. 죄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눈뜨게 하였고 그 때부터 인간은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덤불 속에 숨어 있던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은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러고 보니 세계 최초의 의상 디자이너는 하나님이 아닌가? 이제 우리가 현대 문명 속에서 에덴동산에 살고 있던 아담과 이브처럼 나체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옷에 매이거나 그 속에 자기를 숨기고 사는 태도는 버려야 하겠다. (1993,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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