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 스님 사태 앞에서!

지율의 문제제기

나이는 얼마나 되셨는지 모르지만 체격도 별로이신 비구니께서 100일 이상 물과 소금으로만 견디셨다는 이 끔찍한 사태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사실 무슨 말이 가능하며, 필요하겠는가? 그냥 그런 일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지 그것에 대한 무슨 분석이나 격려나 분발을 촉구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리 말의 범주를 넘을만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말을 통해서 피안과 차안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궁색한 입장에서라도 무언가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말의 유희가 아니라 말의 힘에 사로잡히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서 지율 스님이 죽음을 불사하고 단식을 결행한 저간의 형편에 대해서 세세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대충 알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고, 어쩌면 그런 것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에 주파한다는 꿈의 고속철이 경남 어느 지역인가에 있는 천성산을 관통한다고 한다. 천성산 어느 비구니 사찰에서 수행하고 있는 지율 스님은 현재 진행 중인 천성산 터널 공사를 중지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어제 오늘 불거진 건 아니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고속철 공사가 마무리되었지만 대구에서 부산까지의 공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그동안 불교계와 환경단체가 중심이 되어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소위 도롱뇽 고발 사건’으로 불리는 재판도 열렸고,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단체 안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몇 번의 공사 중단 끝에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터널 공사가 재개되면서 지율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환경 문제에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환경을 다칠 수밖에 없는 고속철에 대한 논의는 좀 복잡하다. 이미 기술 문명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은 끝없이 편리하고 풍요롭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요구하기 때문에 고속철 도입을 막을 도리는 없다. 어쩌면 앞으로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북경과 모스크바, 더 나아가 베를린과 로마까지 이르는 대륙간 고속철의 단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해저 터널을 뚫는 날도 올 것이다. 그렇게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속철을 통해서 서울과 부산의 물류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다면, 그리고 지방과 서울의 공간적 거리가 대폭적으로 축소된다면 이 나라의 전반적인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고속철 시대가 그렇게 장밋빛으로만 전개된다는 보장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막대한 비용도 비용이지만 기존의 철로 외에 또 다른 철로를 놓기 위해서 훼손되어야 할 자연환경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해낼 수 없다. 더구나 고속철에서 나오는 훨씬 높은 소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야생동물들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은 두말할 것 없이 심각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고속철에 들어갈 비용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한다면 고속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치가 생산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제들은 끝이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이지, 그래서 우리가 상황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 수학적인 계산으로 답이 나올 대상이 아니다.
지율 스님과 환경단체들도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내심으로는 고속철 자체를 반대하겠지만 이런 국가적 차원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다만 그들의 주장은 환경영향 평가를 보다 신중하게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에서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권위가 보장되는 민관 합동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율 스님이 단식을 시작할 때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문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하겠다는 안을 정부가 내놓았고 지율 스님 쪽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다행인지 미봉책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환경영향평가에 목숨을 건 이유

그런데 사실 ‘환경영향 평가’도 우리가 결정적으로 신뢰할만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 자연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자연의 미래를 예측하겠다는 건 근본적으로 언어도단이다. 이건 긍정적인 쪽이든지 부정적인 쪽이든지 우리의 예측이라는 게 너무 한정적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자연 환경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시화호가 저렇게 썩어버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는가. 반면에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가 쓰레기 반입 중단 몇 년 후에 저렇게 생태적으로 복원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자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인간이 설계하고 있는 ‘교통영향 평가’도 역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영향 평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외에 우리가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조치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겠지만 모든 대형공사를 단지 학술적인 ‘환경영향 평가’로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약간 현학적이거나 이상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환경과 생태 문제는 우리가 범주화하거나 도구화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이런 문제를 풀어가는 게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저러나 지율 스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에 생명을 거셨는가? 아타(我他)의 구별이 없는 유기론적 만유일체론에 의해서 세계와 생명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에, 그것도 생명을 직접 자기 몸에서 키우는 여성의 눈에 고속철로 인해서 벌어질 반생명적 현상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다가왔기 때문인가. 이런 본질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환경 문제를 다루는 관료들의 무신경이 한 비구니의 자학적인 투쟁을 불러온 것인가. 만약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받아들일 일이지 죽음 일보 직전에 가서야 들어줄 건 무언가? 정부는 이번에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은 셈이다.
다시 묻는다. 지율 스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에 생명을 거셨는가? 나는 이렇게 질문만 할 뿐이지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분의 마음을 내가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기껏해야 이런 정도 이상으로 더 나갈 수 없다. 지율 스님에게는 천성산과 자기가 일체라는 깨달음이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해 놓고도 좀 부끄럽다. 생명을 건 한 인간의 투쟁을 이렇게 단순한 논리나 분석으로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만약 이번에 민관 공동의 환경영향평가에서 공사 불가로 나온다면 괜찮겠지만 공사 가능으로 나온다면 지율 스님의 이런 과격한 행동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까? 이번 사태는 내가 이런 데까지 꼬치꼬치 캐고 묻고 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궁금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어서 대신 질문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공사 가능으로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지율 스님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녀는 ‘신의 아그네스’처럼 평범한 우리가 가까이 가지 못할 어떤 신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것에 순종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소리만을 따랐다고나 해야 할는지. 더구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녀의 생명을 담보한 투쟁은 이익집단의 이전투구로 물든 이 시대에 종교인들의 투쟁 방식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할일을 다 한 것이다.

지율 앞에 있는 기독교

기독교인들은 지율 사태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집회나 반북 친미 기도회에 앞장서고, 약간 격을 달리하지만 여전히 패권적 형태를 보여준 영락교회나 광성교회 문제나 노출시키고, 급기야 공영 티브이 방송국에서 한국교회의 부조리를 방영하는 상태에 까지 왔다. 강남 지역의 교회들이 이기적인 신앙 형태인 ‘특별새벽기도회’에 열중하고, 교인들의 헌금을 과도한 교회당 건축에 사용하는 것에만 마음을 쓰고 있는 한국교회가 지율 스님의 사태 앞에서 눈이라도 껌벅하겠는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가 속으로는 불교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고, 무의촌에 의료 선교도 가고, 고아원과 양로원도 자주 방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행위들은 부수적이고 비본질적이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인식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교회가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한 아무리 남에게 선한 일을 많이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위선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설교자들은 위선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발언이다. 위선은 우리를 점점 자기만족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운동에 참여할만한 동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차라리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게 바로 예수님 당시의 상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율은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거야 사실 지율만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 철학이기도 하고 우리 기독교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을 단지 이론으로만, 교리로만 달달 외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기 몸, 자기 삶과 하나로 깨달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깨달음이 곧 큰 깨우침인 ‘돈오’이며,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메타노이아’, 즉 ‘회개’, 또는 ‘인카나치오’, 즉 ‘성육신’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이런 깨우침과 메타노이아에 이르는 길을 다르게 찾았다는 점이다. 불교는 깊은 사유를 통해서 자기 내부에서 절대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사건을 믿음으로써 절대의 세계가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말이 약간 다른 데로 흘렀다. 지난날 매스컴에 비친 불교는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부활극에서나 볼 수 있던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반면에 기독교는 민주화 투쟁을 위해서 자주 감옥에 드나드는 모습으로 비쳤다. 그런데 이제 양쪽의 그림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우리 기독교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불교는 폭력적인 현대의 문명에 작은 몸을 던져 맞서 싸운 지율을 통해서 평화 지향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종교로 각인되고 있다. 이렇게 뒤바뀐 운명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평할 게 하나도 없지 않을까? (2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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